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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C Apr 02. 2020

봄아, 너 잠깐만
목련을 붙들고 있으렴

<그리움 열여섯> 

- 그리움은 내성이 없다시간은 그리움에 있어서 약이 아니라 병이다     


  

    그리움은 시간에 대한 내성이 없다. 이국(異國)으로 건너와 관상용이 된 고무나무도 무사히 긴 겨울을 나며 기어코 이 땅의 식물로 거듭나는데, 그리움만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커진다. 3년 전 이맘때쯤 태안반도를 설렁설렁 돌아다니다 처음 본 그 자리에서 사랑에 빠졌던 천리포수목원의 목련. 해가 가면 잊히려나? 하지만 오히려 기억 속에서 그 빛과 향기는 더욱 선명해져만 갔다. 열병을 앓다앓다 이 봄에 결국 그 님을 찾아 떠났다.      

    그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천리포수목원을 홀로 일군 후 영원히 숲으로 돌아간 민병갈(본명 칼 밀러). 연합군 중위로 우리 땅에 첫발을 디딘 후 그 아름다움에 반해 완전히 뿌리를 내린 이 미국태생의 한국남자는 목련철만 되면 가급적 바깥 외출을 삼갔다. 한시도 목련꽃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던 그처럼 봄빛 머무는 이 정원에서는 누구라도 목련과 연애하고 싶어진다. 


    연분홍 치마처럼 나풀거리는 진달래도 피고 환한 등불처럼 수선화도 수목원을 밝히지만, 이곳의 주인공은 단연 목련. 이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희귀한 자태의 목련들이 수목원 곳곳에 흐드러지게 핀다. 목련이 릴레이 하듯 피는 천리포수목원은 분명 세상에서 봄이 가장 아름다운 수목원이다. 

    의항리 주변의 산과 들, 심지어 앞바다의 작은 낭새섬까지 천리포수목원에 포함되지만, 그 중 개방되는 곳은 밀러가든뿐. 수목원이 더욱 풍성해질 때까지 관람객의 발길은 차단된다. 회원제로 운영하며 수목원 전 지역에 대해 일반 관람객의 방문 자체를 허용치 않았던 수목원이다. 그 또한 오로지 수목원에 식생하는 수많은 식물을 위한 조치였다. 그러니 마침내 때가 됐다고 판단되면 다른 문들이 열릴 것이다. 지금으로서야 그게 언제일지 알 수 없지만, 그때가 되면 나는 기쁜 마음으로 누구보다 먼저 그곳으로 달려갈 것이다.      

    


    김춘수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전 세계 700여 종의 목련을 보유한 이 수목원에서 그 이름을 정확히 다 불러 줄 사람이 있기나 할까? 이름이야 어찌 됐든 이미 목련은 나에게 멋지고 아름다운 꽃이다. 목련은 연못 남쪽에도 군락을 이루며 피고, 수목원 곳곳에서 풍년화, 섬초롱꽃, 벚꽃 등과 어울려 경쟁하듯 봄을 밀어 올린다. 연못에서 북쪽으로 이어진 작은 오솔길 옆에는 큰별목련이 반짝반짝 빛난다. 하늘나리처럼 꽃잎을 바깥으로 말아 넘기며 활짝 핀 이 목련은 정말 별, 그 중에서도 나를 지켜주는 마음 속 큰 별과 꼭 닮았다.       

   


    어느 곳이든지 마음이 가는 곳에서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시간을 던져버린다. 언제나 턱밑까지 숨차게 밀어붙였던 시간이라는 굴레. 버리고 비우니 가볍고 개운하다. 

    어쩌면 힘든 것을 참아가며 견뎠어야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 풍경들을 두고 일상으로 돌아갈 일이 꿈만 같다. 분명 얼마 못 가 열병이 도질 것이다. 그리고 힘겹게 또 기다리게 될 것이다. 아지랑이처럼 몽롱하게, 그러나 찬연히 피어오르는 목련의 빛과 향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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