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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C Apr 04. 2020

우연이라는 아름다운 필연

<그리움 열여덟> 

- 그 시간그 풍경그 사람……그 한 번이 다는 아니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우연이 낳은 그리움은 다음을 기약하기가 어렵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애틋하다     


 

    우연을 바라는 것보다 바보 같은 짓은 없다. 하지만 우연을 기다리는 것보다 행복한 일도 없다. 딱 한 가지를 제외하면 세상은 필연을 가장한 우연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 다시 말해 필연은 죽음밖에 없다. 탄생은 말할 것도 없이 우연히 이루어지고, 삶 역시 끊임없는 변수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변수가 작용한다는 것은 결국 삶도 우연일 뿐이란 이야기와 무엇이 다를까. 그런데 사실 우연이란 내가 알지 못하는 필연이다. 시커먼 먹구름이 온통 하늘을 덮은 새벽에 향일암을 찾는다고, 한심하게 바라보진 말라는 이야기다. 어떤 우연이 발생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필연이 우연처럼 다가올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향일암으로 이어진 돌계단을 타박타박 올랐다. 갈까 말까 망설이다 갔다. 비가 문제였다. 한참 전에 장마가 끝났건만, 비가 시도 때도 없이 치고 빠졌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것 하나 알아맞히지 못하냐고 기상청을 지독히 원망했다. 하지만 그저 작은 우산 하나 챙기고 다니면 그만이라서 큰마음 먹고 욕받이 목록에서 기상청을 지웠다. 이런 날씨면 어떻고 저런 날씨면 어떠냐고 자포자기하니 마음 하나는 편해졌다. 기상청이 결국 이겼다. 기상청은 아마도 거의 모든 국민을 굴복시킬 것이다. 

    아무튼, 비 예보는 전혀 없었지만 이미 땅이 질펀하게 젖어 있었고 하늘은 어두컴컴했다. 잠시 멈추었을 뿐 언제든 다시 쏟아붓겠다는 비의 굳은 의지가 먹구름으로부터 느껴졌다. 그러나 갔다. 딱히 그렇게 하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어서 갔다. 또 모르지 싶어서 갔다. 갑자기 구름이 모조리 걷히고 해가 인사를 건넬 수도 있는 일. 화창하리란 예보를 조롱하며 비가 내렸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인생이 그렇듯.      


    비가 내린다고 한들 그런대로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늘을 덮은 나무들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숲길을 걷는 일, 해를 보는 암자에서 비를 맞는 일, 항상 북적였던 곳에서 고즈넉함을 느껴보는 일 등, 전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경험이 될 것 같았다. 좋게 생각하면 생각대로 좋은 법. 나는 어찌 되든 좋은 게 좋은 사람이라 나쁜 게 없었고 마냥 좋았다. 

    비는 내리지 않았다. 다만 이미 내렸던 비로 인해 습도가 높아서 조금 꿉꿉했다. 그 탓에 동조차 트기 전의 새벽이었지만 숲길을 걷는 동안 땀이 났다. 역시나 암자는 한적했다. 먼 데서 작정하고 찾았다가 그냥 돌아가지도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올라왔는지, 아니면 나처럼 좋은 게 좋은 부류인지 알 길 없는 몇 사람이 전부였다. 그들의 속사정이야 모르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적어도 그들이 특별한 풍경에 대한 일말의 기대마저 완전히 접었으리라는 것. 숲을 통과해서 마침내 하늘과 바다가 훤히 보이는 향일암에 섰을 때, 묵직한 먹구름이 금방이라도 바다에 닿을 것처럼 내려와 있었기 때문이다. 수평선과 닿을 듯 말 듯 평행선을 그으며 낮게 깔린 구름은 꼭 바다처럼 검푸르렀다. 어느 게 하늘이고 어느 게 바다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 그 둘을 뒤집는대도 딱히 이상하지 않을 정도.      


    그런데 그 자리에 있던 우리 몇은 자연이 그린 환상적인 그림을 감상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구름이 그 모양 그대로 머물지 않았던 것이다. 극적인 변화의 시작을 알린 건 조그마한 어선 한 척이었다. 물론 어선과 그 이후에 벌어진 상황은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선이 고요히 멈춰있던 풍경에 균열을 일으킨 것만은 사실이다. 향일암 바로 아래로 이 어선이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지나갔고 잠시 후, 바다와 구름 사이의 공간이 조금씩 벌어졌다. 굳게 잠겼던 문이 열리는 듯했다. 마침 해가 떠오르며 그 공간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시간이 갈수록 편편하게 깔려있던 구름은 점점 입체적인 뭉게구름으로 변했다. 구름 천지였던 하늘에서 순수한 파랑이 조금씩 영역을 넓혀나갔다. 그쯤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는데, 까치 한 마리가 공중으로 솟구치며 다시는 없을 그 순간의 그림을 완성했다. 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살에 범종은 빛났고, 대웅전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은 이윽고 불기 시작한 바람에 맑은소리로 응답했다.      


    향일암 입구 돌계단까지 왔다가 대부분 되돌아간 날, 더 나빠지지 않으면 다행이었던 날, 기대라고는 할 게 없던 그런 날에 모든 예상을 깨고 일어난 이 일은 우연일까?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라간 사람들에 한해 일어날 일이었던 필연일까? 그건 결코 알 수 없지만, 새로운 뭔가를 바란다면 평소와는 다른 길을 가라고 이 이상했던 날은 말한다. 하던 대로만 하면 결과도 얻던 대로만 얻게 된다고, 궤도를 벗어난다고 해서 인상적인 장면을 마주하게 되리란 보장은 없지만 그럴 조그마한 가능성이라도 생길 거라고. 우연히 또는 필연적으로.     


#향일암 #우연 #필연 #바람 #풍경소리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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