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동환 Feb 21. 2022

아메리카노를 마시게 된 이유

말리꽃 -이승철-

커피를 좋아하지 않았다. 달콤한 믹스 커피는 아주 가끔 마시긴 했지만 아메리카노만큼은 절대 마시지 않았다. 사람들이 왜 아메리카노에 열광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 추운 겨울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손에서 놓지 않는 사람들은 대단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날은 엄청 추운 겨울이었다. 무료한 주말을 달래기 위해 영남대학교가 있는 경산으로 향했다. 대학교 인근의 번화가에서 노래를 부르면 사람을 모으기 좋을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오들오들 떨면서 노래를 불렀다.

추운 날씨임에도 서너 명씩 모여 있었다.

늘 하는 대로 노래를 듣는 관객들에게 소통을 시도했다.


"어떤 노래 불러드릴까요?"


대개 이런 질문을 던지면 너도 나도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추천하지만 그날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정적이 흐르던 와중, 어느 아주머니께서 "옛날 노래도 괜찮나요?"라고 했다.



"네. 당연하죠. 어떤 노래 좋아하시나요?"


"이승철의 말리꽃 불러주시면 안 될까요?"



부활의 2대 보컬이었던 이승철은 1990년대, 신승훈과 김건모와 함께 대중가요의 한 획을 그은 가수다. 이문세조차도 '별이 빛나는 밤에'서 너무 노래를 잘해서 얄밉다고 소개한 적이 있을 정도다. 압도적인 가창력을 가진 그는 2000년대 이후에도 동시대 가수들과 달리 꾸준히 활동하는 그의 말리꽃은 희대의 명곡이다. 그래서인지, 폭넓은 음역대를 요구하는 곡이라 목이 상할까 봐 괜히 망설여지기도 했다. 상당한 호흡까지 필요한 말리꽃은 이승철 본인도 컨디션이 좋을 때만 부르는 곡이기 때문이다. 찰나의 고민 끝에 결국, 그녀의 부탁을 수락했다.


"불러드릴게요! 잠시만요! 반주를 찾아야 해서!"







말리꽃



                                                        이승철




얼마나 더 견뎌야 하는지

짙은 어둠을 헤매고 있어

내가 바란 꿈이라는 것은 없는 걸까?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는 것

지친 두 눈을 뜨는 것 마저

긴 한숨을 내쉬는 것조차 난 힘들어

이렇게 난 쓰러진 채로 끝나는 건 아닐까?

항상 두려웠지만,

지금 내가 가야 할 세상 속에 네가 있기에

지쳐 쓰러지며 되돌아가는 내 삶이 초라해 보인 대도

죽어진 네 모습과 함께 한다면 이제 갈 수 있어

소중하게 담긴 너의 꿈들을 껴안아 네게 가져가려 해

어두운 세상 속에 숨 쉴 날들이 이제 잊히도록

지쳐 쓰러지며 되돌아가는 내 삶이 초라해 보인데도

죽어진 네 모습과 함께 한다면 이제 갈 수 있어

소중하게 남긴 너의 꿈들을 껴안아 네게 가져가려 해

어두운 세상 속에 숨 쉴 날들이 이제 잊히도록







노래가 끝났지만 뭔가 몽롱한 느낌을 전달하는 이승철의 매력을 100% 전달하지 못한 것 같아서 스스로 실망감이 컸다. 이승철 발성의 큰 특징인 약 고음과 호흡 조절 그리고 부드러움을 표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목에 무리만 간 기분이었다. 하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서너 명뿐이라도 그들은 관객이니까.


"감사합니다. 연습이 되지 않은 곡이라 미흡한 부분이 많았어요."


말리꽃을 추천한 아주머니는 자리를 털고 어디론가 유유히 가셨다. 아마도 노래가 만족스럽지 않았던 것 같다. 살짝 풀이 죽었지만 공연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조금 뒤, 잠시 쉬고 있던 내 등을 누군가 툭툭 쳤다. 아주머니였다.


"추운데, 고생이 많으세요. 노래 정말 잘 들었습니다."


그녀의 손에는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있었다. 커피를 주신 뒤, 아주머니는 다시 공연을 듣기 위해 자리를 이동하셨다. 다시 한번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꾸벅 인사를 한 뒤, 아메리카노의 플라스틱 뚜껑을 열었다. 애초에 아메리카노를 마시지 않는 나였지만 아주머니에게 마시는 모습을 보여줘야 예의일 것 같았다. 무엇보다 너무 추웠기에 따뜻한 기운이 필요했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과 함께 마신 아메리카노는 고소했다. 내가 알던 떫은 그 맛이 아니었다. 따뜻한 커피는 몸을 녹여줬고 각성할 수 있도록 힘을 줬다. 덕분이었을까? 그날은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2시간 이상 노래를 불렀다. 이후, 나는 몇 년 동안 한 여름에도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남들은 '얼죽아'지만 나는 반대였다. 얼죽아는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줄임말이다. 나는 뜨거워 죽어도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이름 모를 아주머니의 따뜻한 배려와 감사 덕분에 그렇게 나는 오늘까지 아메리카노를 마시게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추억에 새살을 입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