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멋을 자랑하는 불교문화를 비롯한 선진문화를 교류한 백제는 일본의 역사에서 빼려야 뺄 수 없는 한반도의 고대 국가이다. 최근 퇴임한 아키히토 일본 국왕이 공개적으로 자신의 모계 혈통이 백제의 무령왕이라는 사실을 고백했었고 그의 한마디는 한일 양국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해외에서 고대 한반도의 발자취를 가장 자세히 볼 수 있는 일본에서 한반도와 연관된 사실을 직접 언급한 것이 역대 일왕 중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구마모토의 팔각형 기쿠치성
미야자키 백제왕신사
미야자키 백제관의 일부
그의 발언은 ‘일본은 또 다른 백제일까?’라는 고찰을 심어줬고 그런 이유에서 백제를 찾아 떠났다. 백제식 축성방법인 구마모토의 팔각형 기쿠치성, 백제의 마지막 왕족 정가왕의 전설이 전해져 오는 미야자키의 백제마을, 백제 왕족의 섬세한 유물을 전시하는 미야자키의 백제관, 논어와 천자문을 전수해준 오사카의 백제인 왕인박사 묘지와 백제왕신사는 한일 사이의 깊은 관계를 증명해주는 역사의 퍼즐 조각이었다. 어렵사리 떠난 답사에서 만난 백제의 흔적들은 관리 소홀로 인해 가슴 한 구석을 찡하게 만들어주었다. 모든 장소로 가는 교통편이 아주 열악한 것은 당연했고 왕인박사 묘지에서는 고등학생들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도 보았기 때문이다.
카카라시마섬으로 향하는 길
단순한 관광지가 아닌 우리와 연관된 역사의 현장들 속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카카라시마섬은 그러한 고찰을 해결해준 곳이었다. 둘레가 겨우 12km인 이곳은 100명 남짓 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아주 작은 섬으로 손때 묻은 유물 하나 없이 휑했다. 후쿠오카에서 기차와 버스 그리고 여객선을 갈아타야 했기 때문에 웬만한 백제 유적지보다 더 고생길이었지만 이곳을 찾은 명분은 확실했다.
카카라시마섬
아키히토 일왕이 고백한 혈통의 뿌리인 무령왕의 탄생지가 바로 카카라시마섬이기 때문이었다. 지금처럼 국경의 개념이 복잡하지 않았던 시절이지만 백제의 왕이 일본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허리띠를 풀고 아이를 낳은 포구라는 의미의 ‘오비야우라’는 무령왕이 태어난 해안 동굴로써 선착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비탈길을 따라서 올라가야 했다. 길 한중간에는 무령왕릉입구의 아치 모양을 본떠 만든 무령왕탄생기념비가 있었는데 함께 건립한 한국의 공주시와 일본의 가라츠시의 우호교류의 상징이었다. 500m 정도 올라가서 좁은 샛길로 발걸음 옮기자 수풀로 가려져 있던 새파란 바다와 하늘의 경치가 펼쳐졌다.
화사한 날씨를 만끽하며 기분 좋게 걸어간 길 끝자락은 산뜻한 기분을 싹 사라지게 해 줬다. 무령왕이 첫 목욕을 한 것으로 알려진 우물가는 조잡한 나무막대를 대충 둘러친 형태였고 해변은 밀려온 쓰레기 더미로 몸살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변의 왼쪽 편에 위치한 해안 동굴에는 누가 갖다 놓았는지 모를 술잔과 화분으로 이뤄진 초라한 제단이 있었다. 아주 작았지만 바로 그곳이 무령왕이 태어난 동굴 ‘오비야우라’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천대받고 있는 무령왕의 행적은 한낱 여행이 좋아서, 역사를 알고 싶어서 바다 건너온 이방인이게 상념을 심어줬다. 우리나라와 연관된 신성한 장소가 이렇게 더러운 것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그러한 생각은 해변에 널브러진 페트병과 과자봉지를 주섬주섬 챙긴 뒤 선착장으로 되돌아가는 즉각적 반응으로 이어졌다. 돌아가는 길 옛것을 중요시하는 일본에서 소중한 유적지를 이렇게 소홀하게 관리한다는 사실이 이들은 또 다른 백제가 아니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선착장 주변에서 겨우 찾은 쓰레기통을 바라보며 누군가에게는 쓸데없는 고찰일 수도 있는 이런 탐구 자체가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지기 위한 첫걸음이란 생각을 했다. 주섬주섬 챙겨 온 쓰레기를 버리면서 역사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은 나를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어줬다고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