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하러 공원을 간 네 사람(?)의 시선을 보여주는 그림책. 사람의 시각과 생각하는 것이 저마다 다를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첫 번째 아이와 개와 함께 공원으로 산책을 간 엄마의 시선, 두 번째 아이와 개와 함께 공원으로 산책을 간 아빠의 시선, 세 번째 엄마와 함께 공원을 간 남자아이의 시선, 마지막으로 아빠와 함께 공원을 간 여자아이의 시선이었다.
공원에 가면 개의 목줄을 풀어주는 엄마. 이 그림책이 나왔을 당시가 오래돼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문화적 차이인 것일까? 요즘 우리나라에선 공원에서 반려견의 목줄을 함부로 풀어주면 안 되는데 이 그림책에선 개의 목줄을 스스럼없이 풀어주는 모습을 보며, 달려 다니는 개를 자유롭게 내버려두는 모습을 보며 개를 무서워하는 내 입장에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마 문화적 차이겠지?
일자리를 잃은 아빠인지 아빠는 뭔가 실의에 빠진 것 같았고, 참 무기력해 보였다. 살아가는데 아무런 희망도 없고, 절망에 빠진 아빠가 개와 딸을 데리고 공원으로 향하는 길에 크리스마스시즌인지 산타복을 입고 도움을 청하는 고릴라와 명화와 비슷한 그림의 액자를 보면서 역시 앤서니브라운이구나 싶었다. 아빠의 절망에 빠진 모습을 그리듯 명화에 그려진 표정도 실의에 빠진 모습이었다. 그런데 공원에 도착하고, 신문의 구인광고를 한참 들여다보던 아빠. 그리고 공원에서 집에 가는데 딸의 조잘거림으로 희망을 느낀 아빠의 전환점에서 똑같이 집을 지나왔던 거리에서 액자의 그림들이 튀어나와 춤을 추고, 실의에 빠졌을 땐 벽에 깨진 하트가 그려져 있었던 반면에 희망을 얻은 후에는 벽에 빨간 하트가 그려져 있는 것도 그렇고 어두웠던 주변 건물의 창문에 알록달록 불빛이 들어온 것도 그렇고 희망을 가져보겠다는 아빠의 마음이 대변된 것 같아 내 마음도 괜히 흐뭇했다. 역시 부모는 아무리 힘들어도 힘을 내야 하는 이유로 자식인 것 같았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아들이 된 것처럼.
엄마와 함께 공원에 갔던 아들. 함께 갔던 개가 친구를 만나 함께 뛰어노는 모습이 부러웠다. 나도 개처럼 함께 친구랑 뛰어놀고 싶은데 라는 생각을 하던 와중에 한 여자친구가 다가왔다. 그렇게 둘은 한참을 함께 놀았다. 엄마가 집에 가자고 하기 전까지. 집에 가는 게 아쉬웠다. 다음에도 그 친구가 공원에 왔으면 좋겠고, 그 친구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아쉬움 속에 집을 향했다. 둘은 과연 나중에 함께 만났을까?
아빠와 함께 공원에 갔던 딸. 용기 있게 옆에 있던 친구에게 말을 걸어 친구와 함께 놀았다. 개들도 함께 다 같이 노니까 재밌었다. 친구 엄마가 가야 한다고 했다. 뒤돌아서 아쉬워하면서 가는 친구를 봤다. 집에 돌아와서 아빠와 따뜻한 차를 마셨는데 개들이 함께 놀던 모습의 그림이 담긴 컵으로 차를 마시며 이야기가 끝이 났다.
같은 장소를 가더라도 각각 저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달랐다는 것, 각자마다 개성이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겠지? 이 책의 마지막을 보면서 빅토리아와 앨버트인 개들의 시선도 나왔더라면 좋았을걸, 그들의 시선도 궁금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앤서니브라운 그림책의 특징을 보면 사람이 아닌 원숭이와 고릴라가 많이 나온다는 점, 모나리자 등을 연상케 하는 명화가 나왔다는 점에서 이 그림책도 역시나 앤서니브라운의 그림책이구나 싶었다. 그리고 곳곳에 작가의 특성을 나타낼 수 있는 그림 장치들이 많이 나와 그 장치들을 찾으면서 보니 숨은 그림 찾기 하듯 재밌었다. 앤서니브라운의 그림책은 항상 그만의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