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혼자 가만히 화장실에 앉아 볼일을 보고 있을 때나 소파에 가만히 앉아 멍하게 있을 때면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나는 과연 쓸모 있는 사람인가?’
벌써 2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하게 되면서 나에게도 경력단절이라는 순간이 찾아왔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둘 땐 금방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돌아갈 곳을 점점 잃어가고 있고, 공허해지는 순간들이 밀려왔다. 그때 불현듯 나온 지 얼마 안 된 이 책이 떠올랐다. <나의 쓸모>. 제목만 봤을 때는 지금의 내가 읽기 딱 좋은 그런 그림책일 것 같았다.
한 화병이 있었다. 이 화병은 정말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을 최악의 일을 겪었다. 전봇대에 버려진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 한 할머니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집 베란다에는 다른 터줏대감 같은 화분들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쟤는 10번째네? 어디서 어떻게 오게 된 걸까? “
”전봇대에 버려져있었데 “
”...... “
다른 화분들이 나를 10번째라고 하면서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이 싫었다. 그리고 내 안에 흙이 들어오는 것도 싫었고, 물벼락을 맞는 것도 싫었다. 벌레들이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것도 싫었고, 무엇보다도 베란다에 있다는 이 상황이 다 싫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화병에 새싹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화병은 이제 내게서 무언가 자라나고 있다는 생각에 행복했다. 그래서 화병은 새싹을 더 잘 자라게 하기 위해 뜨거운 태양도 견뎠고, 그렇게 싫었던 물도 맞았으며 새싹이 자라나는데 좋다는 지렁이가 꿈틀거려도 견뎠다. 새싹에게 좋다는 건 본인이 싫어도 다 견뎌냈다. 밤에는 심지어 새싹에게 자장가까지 불러주었다. 오로지 새싹이 건강하게 자라게 하기 위해서.
이러한 화병의 사랑과 노력 때문인지 몰라도 새싹은 무럭무럭 자라 꽃을 피웠다. 화병은 자신이 다시는 못할 줄 알았던 꽃을 담을 수 있게 되자 몹시 기뻤다. 베란다에 있는 화병과 꽃은 마치 반짝이는 별과 달 같았다. 시간이 흘러 화병의 꽃은 지고 열매를 맺게 되었고 그렇게 싫어했던 화분들의 수다였으나 어느덧 자신도 화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화병은 지금처럼 이렇게 화분으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의 화병의 모습에서 요즘의 내 모습을 봤다. 나 또한 직장을 그만둔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금방 다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육아에 전념하게 되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게 되고 아이의 발달 속도는 내 뜻대로 되지 않자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름의 힘든 시간을 많이 보내고 모진 수모도 겪어야 했었다. 그렇게 나는 육아에 전념하면서도 아이의 발달 속도를 끌어올리지 못한다고 자책하는 쓸모없는 엄마였다.
마치 화병이 새싹을 키우기 위해 싫어했던 쿰쿰한 흙도 견디고, 차가운 물벼락도 맞고 뜨거운 태양도 맞았듯이 새싹이 화병의 노력으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것처럼 센터를 매일 다니고, 아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려주고 그림책도 아이 수준에 맞는 쉬운 그림책을 반복적으로 읽어준 노력으로 아이는 갑자기 눈부신 성장을 해나가고 있다. 말을 거의 하지 못했던 아이가 외워서라도 조금씩 내 입을 보고, 내 눈을 보고 더듬더듬 자신이 원하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육아를 하면서 다시 직장으로 가고 싶다는 마음이 한편에 있었지만, 화병이 화분처럼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듯이 아이의 눈부신 성장을 보니 이렇게 엄마로만 살아가는 것도 보람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밝고 건강하게 자라게 하기 위해, 아이의 발달 속도를 정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나는 더더욱 노력할 것이다. 쓸모 있는 엄마로 살아간다는 것, 나쁘지 않다. 그 이후의 삶은 그 이후에 생각하련다.
이 책이 참 재밌는 게 앞 면지는 찌푸리고 아무것도 없는 화병들이 그려져 있다. 뒷 면지를 넘겨보면 웃고 꽃과 나무들이 담긴 화병들이 그려져 있다. 책을 보면서 나는 참 많은 위로를 받았다. 사람인지라 앞으로 살아가면서 ‘과연 나는 쓸모 있는 사람인가?’라는 생각을 안 할 순 없겠다. 만약 이런 생각을 또 한 번씩 떠올릴 때면 이 책을 꺼내보며 위로를 받아야겠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쓸모 있고, 없고에 대한 생각은 한 끗 차이기도 했다. 가치있는 삶은 과연 어떤 삶인가 생각해보면 좋은 그림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