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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정 Aug 28. 2020

그와 나의 반려견 논리

#4

어렵사리 부모님께 달콩이를 인정받았지만 사실 다른 그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남편 홍군의 의견이었다. 앞서 ‘남편을 설득했다’라고만 언급하고 넘어갔던 이유는 이에 대해 쓸 이야기가 많기 때문이다.
 
  홍군은 나처럼 강아지를 아주 좋아하고 또 언젠가는 키우고 싶어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강아지를 입양하는 데에는 다소 회의적이었다. 사실 나는 경제적인 문제나 강아지를 키울 경우 우리가 희생해야 하는 것들, 그러니까 보호자의 입장에서 강아지 입양을 많이 고민해왔다. 하지만 홍군의 시각은 조금 달랐다. ‘강아지는 밖에서 뛰노는 본능을 가진 동물인데, 이런 좁은 공간에 살면서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같은 요소들이 그의 주된 고민거리였다. 우리는 언젠가 정원이 딸린 주택에 살자는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꿈을 이룰 때쯤 강아지를 입양하는 게 맞을 것 같다고 그는 이야기하곤 했다. 좀 더 강아지 입장에 치우친 논리였다.

 우리 둘은 강아지를 키워 본 경험이 서로 달랐다. 그는 실내에서 강아지를 키워본 적은 없었다. 대신 부모님께서 시골집 앞에 강아지를 묶어놓고 키우신 적은 있었다. 연애할 적에 홍군은 그 강아지에 대해 종종 이야기하곤 했는데, 묶여있는 녀석을 보며 항상 마음이 안 좋았다고 했다. 그 불편한 마음이 쌓이다 보니 환경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로 강아지를 키우는 것은 못할 행동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그가 생각하는 ‘갖춰진 환경’에 아파트는 없었다.
  
 반면 나는 11년 남짓 되는 시간 동안 아파트 안에서 시츄를 키웠다. 내가 6학년 때 우리 집에 왔으니 벌써 거의 20년 전의 일이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반려동물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았다. 그때는 ‘반려견’이라는 단어조차 없었고 ‘애완견’이라는 단어만 있었다. 지금은 ‘보호자’라고들 하지만 그때는 말 그대로 ‘주인’이었다. 식구들은 강아지를 가족의 구성원 중 하나로써 진심으로 사랑하고 예뻐했으나 그 방식이 지금과는 조금 달랐다. 애완견은 주인에게 복종하는 존재라는 인식도 비일비재했다.
 일례로, 나를 포함하여 내 주변에 강아지를 키우는 친구들은 정말 많았지만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산책을 시켜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강아지를 위해 하루에 한 번 이상 산책을 시켜주는 보호자도 많다. 특히 실외에서만 배변을 하는 강아지의 경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에 네 번씩 산책을 나가기도 한다는데... 이런 것을 보면 20년 남짓 되는 시간 동안 반려견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뀐 것은 기정사실이다.


 나 역시 11년간 키웠던 시츄인 꾸부에게 너무 못해주었다는 죄책감이 항상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랬기에 홍군처럼 ‘우리가 강아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과 의심이 컸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옛날과 비교하면 지금은 내가 해줄 수 있는 것들이 훨씬 많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조심스생각했다. 난 유기견 출신인 달콩이를 입양하여, 새로운 견생을 선물해주고, 산책도 거의 매일 시켜줄 것이며, 다양한 교육도 시켜주고, 좋은 사료를 먹일 것이고, 또 당연하게도 사랑을 듬뿍 줄 것이며, 한동안은 집에 달콩이 혼자 있 시간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 정도면 달콩이에게도 괜찮은 견생 아닐까? 강아지에게 “너 행복하니?”라고 묻는다 해도 그 대답은 평생 알 수 없겠지만.

 이렇듯 그와 나의 견해는 일치하는 듯 달라서 쉽사리 좁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듣다 보면 나의 주장은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요즘이야말로 강아지들이 사람보다 더 호강하는 세상이라고들 하지 않는가. 예쁜 옷을 입히고, 생일 케이크를 먹이고, 유치원에 데려가고, 심지어 강아지가 스파와 마사지를 받는 샵도 있다고...! 그런데 문제는, 이 모든 것들이 진정 강아지가 원하는 일이냐는 거다. 동물을 소유하고, 실내에 가두어놓고 키운다는 것 자체가 그저 인간의 이기적인 생각은 아닐까? 이런 원초적인 문제들을 묻고 따지기 시작하다 보면 나 역시 자신이 없어졌다.
 
 하지만 그렇게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의 논리 속에 빠져들다가도 나는 결국 그를 설득해야만 했다. 진심으로 강아지를 키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 포기하려고 백번 노력해보았지만 포기가 안되었기 때문이다.
“오빠 말이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강아지는 인간과 함께 사는 방식으로 진화해왔다. 그러니 인간과 함께 할 때 강아지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피스텔에서 키우든, 야외에서 키우든, 주택에서 키우든, 사는 환경이 좋다고 해서 무조건 더 행복한 것은 아니다. 재벌집에서 자란 아이의 인생이 행복하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주장이었다.

 사실 홍군은 애초부터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 매일 같이 우는 아내를 이길 생각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내가 갈팡질팡하며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할 때 어느 정도 중립을 지키고 있었을 뿐. 돌이켜보면 내가 그에게 명확하게 “강아지 키우자. 나 준비됐어.”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나 역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내가 확신을 가지고 나름의 논리를 주장할 때쯤에서야, 그는 대답했다.

“좋아. 우리 강아지 입양하자. 여보, 고생 많았어.”





아파트에 사는 답답함을 풀어주기 위해서, 접종이 끝나기 전에도 달콩이에게 종종 바깥 세상을 구경시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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