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이 마음의 감기라고들 하는데 순 거짓말인 것 같다. (감기만큼 흔하다는 의미에서는 맞다.) 현재 난 우울증은 아니고, 대신 불안장애를 앓고 있는 경우라 조금 다르지만. 같은 정신 질환이라는 맥락에서 말이다.
정신 질환은 감기처럼 빨리 낫지 않는다. 주사 맞고 일주일 치 약을 받는다 해서 말끔히 씻겨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끈기를 가지고 제법 오랜 시간 치료를 받아야 하고, 상태에 따라 약도 조심스럽게 늘렸다 줄였다를 반복한다. 환자를 진심으로 치료하는 의사를 만날수록 치료는 더욱 신중하게 진행된다. 지름길을 바라다가는 금방 재발하기 일쑤다.
재작년에 힘든 일들을 겪으며 공황이 오는 바람에 1년 동안 정신의학과에 다니며 약을 먹었다. 천사 같은 선생님께 상담받는 시간도, 약을 먹으면 평화가 찾아오는 것도 좋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러 번 치료를 그만두고 싶었다. 원체 불안과 긴장이라는 존재와 오래도록 함께 해와서인지 약을 먹으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되곤 했다.
특히 글을 쓸 때는 나의 '진짜 감정'이 여실히 필요해졌다. 글을 다듬는 과정을 지나면 마지막에는 감정이 절제된 글이 만들어지지만, 그럼에도 처음 쓸 때에는 나의 감정을 온전히 다해서 써야 한다. 그것이 내가 글을 쓰는 방식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무감정의 상태에서는 글을 쓰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글을 쓸 땐 모든 신경의 촉수를 뾰족하게 세워야 하는 데, 약을 먹으면 신경들이 뭉툭한 모양이 돼서는 게을러져 버리는 것이다.
이번에 다시 공황이 찾아와서 병원을 향하며 나는 생각했다. 어떻게 해서든 치료약은 피하고 싶다고. 선생님께 비상약만 받으면 안 되는지 여쭤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사실 이전에도 1년 내내 마냥 고분고분하게 치료를 받은 건 아니었다. 치료가 너무 긴 시간 지속되자 '이제 약을 안 먹어도 괜찮지 않을까?'라고 혼자 판단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의 상태는 그리 심각하지 않은데, 치료가 그렇게 오래 걸린다는 걸 다소 이해하기어려웠다. 나에겐 종종 공황 증상이 찾아오지만 공황 장애라고 진단을 내리기엔 약한 수준이다. 게다가 스스로 나의 정신 건강은 제법 건강한 편이라고 자부한다. 그런데도 그렇게 오랜 시간 약을 먹고 있다는 사실이 싫어서, 결국 중간에 내 멋대로 약을 끊었다. 한동안은 괜찮더니 시간이 조금 지나자 보란 듯이 다시 공황 증상이 올라왔다. 죄를 지은 아이마냥 바로 선생님께 달려갔다.
"선생님, 죄송해요."
눈치를 보며 들어간 진료실에서 선생님은 온화한 얼굴로 답하셨다.
"괜찮아요. 약을 안 먹어도 될 정도로 본인의 상태가 좋아졌다고 생각한 거잖아요. 그게 많이 나았다는 증거예요. 그렇지만 이번에 겪었듯 불안 치료에는 시간이 필요해요. 다시 꾸준히 치료 잘 받아봅시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치료를 받았지만 한 번 떠버린 마음은 가라앉히기 어려웠다. 몇 달간 의무감으로 치료를 받다가 그쯤 반려견 달콩이를 입양했다. 제법 큰 행복이 생기자 나는 또다시 임의로 치료를 중단했고, 다행히 한동안 공황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 후로 1년이 지났다. 그동안 좋은 일도 있고 힘든 일도 있었지만 제법 성숙하게 잘 지나왔다. 가끔 침대에 누우면 숨이 막혀오긴 했어도 괜찮았다. 종종 뒷골이 당겨오고 잠을 못 자는 날도 많았지만 괜찮았다. 나의 일상이 꽤 평범하게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최근 유방의 양성종양을 절제하는 작은 수술을 했는데, 부분 마취 특성상 수술하는 걸 모두 지켜봐야 했다. 30분 남짓되는 수술 시간 동안 상상했던 그 이상으로 공포스러웠고 또 아팠다. 게다가 수술이 끝난 뒤에는 가슴 위에 압박 붕대를 칭칭 감았다.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흉통이 조여 오는 24시간 동안 나는 혹시라도 공황이 다시 올까 봐 걱정했다. 그 걱정이 트리거가 되어 며칠 뒤 정말로 공황이 찾아왔다.
선생님께 그간의 상황을 열심히 설명했다. 선생님, 저 정말 잘 지냈구요. 힘든 일이 생겨도 자신을 잘 지켜냈어요. 게다가 요즘은 좋은 일도 많아요. 글 쓰는 것도 너무 행복하고, 열심히 하다 보니 이제 하나씩 결실도 맺는 것 같고... 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듣는 내내 다정한 웃음을 곁들여 칭찬해주셨다. 잘했어요, 정말 잘했어요. 하시면서. 내게 다시 공황이 온 이유는 그저 수술과 압박 붕대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일시적일 뿐이니 심할 때 먹을 수 있는 신경 안정제나, 필요할 때 수면에 도움이 될 수 있을 약만 조금 받고 끝내고 싶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치료약 1주일 치랑 비상약 드릴 테니 일주일 뒤에 다시 오세요. 약을 안 먹은 지 오래됐으니 아주 적은 용량에서 다시 시작할 거예요."
시간이 없는 선생님을 끝까지 붙들고 늘어졌다. 운전 중에 공황이 오기 때문에 병원까지 자주 오는 게 힘들다고 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약을 2주 치로 늘려주실 뿐이었다. 약을 먹으면 글 쓰는 데 지장이 있다고 했다. 선생님은 “온정 씨 작년에도 약 먹으면서 책 잘 썼어요.”라고 하셨다. 아니라는 걸, 괜찮다는 걸 아무리 강조해도 선생님은 단호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당신의 증상은 치료를 필요로 하고 있어요, 라는 메시지를 선생님은 말없이 전하고 있었다.
두꺼운 약 뭉치를 받아 들고, 억울한 표정으로 병원을 나와서 상담했던 내용을 다시 곱씹어 봤다. 선생님께 오랫동안 열심히 준비한 게 잘 진행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였다.
"축하해요. 다 온정 씨가 노력해서 얻어낸 거네요. 온정 씨는 그걸 알고 나서 감정이 어땠어요?"
"행복했어요. 그런데 어렵게 얻은 기회니까, 잘 해내고 싶어서 머릿속으로 이것저것 많이 생각하고 걱정했어요.”
"음, 그랬죠."
그랬죠,라고 대답하는 선생님은 마치 공황의 어떤 단서를 얻은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셨다. 좋은 일에서까지도 나 자신은 또 다른 불안을 끌어오고 있었다. 돌아보니 이번 상담 중 대부분의 대화가 이런 식이었다. “요즘 인간관계는 어때요?”라고 물으시면, “힘들지 않기 위해 인간관계를 많이 끊어냈어요.”라고 답했고, “잘하고 있어요. 그럼 요즘 인간관계에서 힘든 건 없는 거예요?”라고 다시 물으시고 나면, 순간 할 말이 없어졌다. ‘그런데’로 시작되는 말로 대답하다 보면 알게 모르게 요즘 불안할 요소가 많았다는 걸 깨달았다.
“선생님. 왜 잘 살고 있는데 공황이 다시 찾아온 걸까요? 힘들 때만 불안해지는 게 아니고, 행복해도 불안해지는 것 같아요.”
이 말에 직접적으로 대답 하시진 않았지만, 그 뒤로 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선생님은 여러 번 말씀하셨다.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말라고. 앞으로의 일을 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다 그래서 그런 거라고. 내가 약을 먹으면 글이 안 써진다고 걱정할 때도 선생님은 그저 나의 눈을 한참 지긋이 쳐다보며 웃으셨다. ‘으이구. 또!또 미리 걱정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 뜨끔했다.
치료약을 받지 않으려 분투했던 시간이 무색하게, 집에 돌아와 약 봉투를 보는 데 안도감이 밀려왔다. 갑작스럽게 공황이 와도 가라앉힐 수 있는 비상약이 있어서, 기타의 현처럼 머리 꼭대기까지 팽팽하게 올라온 신경들을 느슨하게 풀어줄 수 있어서. 오랜만에 저녁 약을 먹은 그날 나에게는 평화가 찾아왔다. 침대에 누웠을 때 몸이 녹아드는 기분이 오랜만이라고 느꼈다. 플라시보 효과이든 진짜 약 효과이든 상관없었다. 일단 숨이 트였고, 나는 살 것 같았고, 이렇게 살 수 있다면 성실하게 치료받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