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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정 Mar 25. 2022

시댁 온실에 울려 퍼진 웃음소리

가만 있으면 되는데 자꾸만 뭘 그렇게 할라 그래

남편과 함께 5일 동안 시댁에 내려갔다 왔어요. '시댁 5일 살기'랄까요...?


시부모님은 시골에서 꽃 농사를 짓고 계신데요. 큼지막한 온실 속에서 매일매일 바쁘게 일하신답니다. 매번 '가서 도와드려야지, 도와드려야지...' 생각만 하고는 막상 러지 못했어요. 가봤자 주말 이틀뿐이었으니 일은 커녕 놀다 오기 바빴죠.  아무래도 기간이 좀 길어야 뭐라도 도와드릴 수 있겠다 싶어서 이번에는 휴가 내고 가서 제법 오랫동안 머무른 거였어요. 맛있는 것도 잔뜩 먹고, 시부모님과 그간 못했던 이야기들도 많이 나누고, 상쾌한 시골 공기도 실컷 마시면서 정말 행복한 시간을 보냈죠. 시부모님께서 온종일 바쁘게 움직이시는 모습을 보니 진작에 자주 좀 도와드리러 올걸... 후회도 되고, 또 힘들게 일하시는 게 걱정도 되더라구요.


온실에는 곳곳에 스피커가 있어서 라디오가 항상 큰 소리로 흘러나와요. 어느 날은 어머님, 아버님, 남편과 같이 수다도 떨고 라디오도 들으면서 꽃을 손질하고 있는데, 독특한 노래 하나가 흘러나오는 거예요. 장기하의 <가만 있으면 되는데 자꾸만 뭘 그렇게 할라 그래>였는데요. 앞부분에 판소리가 자꾸 나올 듯 안 나올 듯 뚝뚝 끊기길래 제가 "이건 뭔 노래지?"하고 중얼거렸더니, 그다음에 남자 목소리가 나오는 걸 들으신 어머님께서 "장기하인가보다! 이 사람 노래, 귀에 콕콕 박히고 아주 재밌더라~" 하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리고는 즉흥적으로 그 노래를 장기하 스타일로 따라 하셨어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아버님을 쳐다보시면서,

"♬가마아아아아안~~있음되는데 자꼬만 뭘 그렇게에 할라 그래!" 라고, 살짝 호통치듯이, 어깨춤과 함께 반복하셨죠.

그랬더니 아버님도 껄껄 웃으시면서

"그니깐. 가마아아아아안~~있음되는데, 자만 뭘 그렇게에 할라 그래!" 하고 받아치시는 거 있죠. 두 분이 서로 쿵짝쿵짝 주고받으시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다 같이 깔깔대다가, 그 뒤로도 한동안 넷이서 그 가사를 읊으며 웃었답니다.

정말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부지런히 사시는 어머님, 아버님께 꼭 필요한 가사라서 더 돋보였던 것 같아요. 서로의 얼굴을 보며, 우리도 제발 가만히 좀 있어보자고 이야기하시는 것 같았달까요.

아마 장기하가 이 곡을 만든 의도도 비슷한 거 아니었을까? 싶어요. 장기하가 이 노래를 라이브로 부르는 영상을 보았는데요. 6분 내내 "가만 있으면 되는데 자꾸만 뭘 그렇게 할라 그래"라고 반복하며 말하면서, 정작 본인은 와이어를 타고 공중 부양을 하면서 연신 파닥파닥 거리거든요. 정작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람이 가만히 있으라고 호통을 칠 때. 그 아이러니한 연출에서 메시지가 더 강력하게 전달되는 효과가 있었지요.


어쨌든, 5일이면 제법 긴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요. 마지막 날 아쉬워서 집에 돌아가기 싫을 정도로 시간이 금방 지나갔어요. '시댁 한 달 살기' 정도 해야 안 아쉬울까 싶네요. 앞으로 종종 찾아뵙고 일도 도와드리고 함께 즐거운 시간 보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고 계실 어머님과 아버님께서 한 번 더 어깨춤을 추실 수 있도록! 최고의 노동요, 장기하의 <가만 있으면 되는데 자꾸만 뭘 그렇게 할라 그래> 신청합니다.





위 글은 라디오 사연처럼 적어보았습니다 :)

(실제로 라디오에도 짧은 버전으로 보냈는데, 채택이 될지는 모르겠네요 ㅎㅎㅎ)


+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나온 장기하 영상 올려드려요. 가사가 한 줄밖에 없는 무려 6분짜리 곡이에요. 처음에는 뭐 이런 음악이 다 있나, 싶은데요. 들으면 들을수록 그 안에 담긴 뜻을 곱씹게 되는 곡입니다. 어머님 덕분에 장기하라는 뮤지션을 다시 보게 되었네요 :)


* 장기하 <가만 있으면 되는데 자꾸만 뭘 그렇게 할라 그래> 소개 영상 (짧은 클립)


* 장기하 라이브 영상 <가만 있으면 되는데 자꾸만 뭘 그렇게 할라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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