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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정 May 11. 2022

나의 정신의학과 정착기

"지금 접수하시면 2시 30분에 진료 가능요. 접수해드릴까요?"

"네, 접수해주세요. 나갔다가 그 시간에 다시 들어올게요."


 오전 9시 30분에 여는 병원. 근무 중에 잠시 나와서 9시 40분쯤 병원에 도착했는데 이미 대기 인원이 다섯 시간 치나 밀려있다. 운 좋으면 한 시간 만에 진료를 받을 때도 있지만 휴일 다음 날은 어느 시간대에 가도 기본 세 시간 이상 걸린다. 예전에는 접수할 때마다 예상 진료 시간을 듣고 화들짝 놀이제는 3년이나 다닌 단골손님이니 그러려니 한다.

 백수일 때는 나마 접수해두고 근처 카페에서 시간을 때우곤 했는데, 근무 중에 두 번이나 밖에 나가는 일은 번거로울뿐더러 눈치가 보인다. 걸어갔다 오면 왕복 30-40분 거리이고 차를 끌고 가자니 주차할 곳이 없다. 접수하는 데 겨우 3분밖에 안 걸리는데도 잠시 차 세워 둘 곳을 찾느라 헤매다 보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 병원 찾아온 사람들은 병을 고치러 왔다가 오히려 얻어가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료실 문을 열기까지의 과정이 이토록 험난한데도 사람들이 이 병원을 찾아오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내가  처음으로 정신의학과에 건 고등학생 때였다. 당시엔 정신과에 대한 시선이 지금보다 안 좋았다. 정신과 기록이 있으면 나중에 입시, 취업 등에 불이익이 있을 수 있다는 말도 흔했다. 이게 대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좋은 대학 가서 좋은 곳에 취업하겠다고 치열하게 공부하다가 아게 된 건데, 혹시 나중에 "우울증과 불안 장애 진단 기록이 있군요. 채용이 어렵겠습니다."라는 말을 듣는다면 얼마나 억울하겠냔 말이다. 부모님도 웬만하면 딸이 자연 치유(?)길 바라셨지만, 날 병원에 데리고 가실 때쯤에는 이대로 두면 큰일 나겠다 싶을 정도로 나의 상태가 안 좋았던 것 같다.

 부모님이 내리신 대책은 병원에 가되 기록이 남지 않도록 보험 적용을 포기하는 방법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딸을 병원으로 데리고 가신 부모님의 용기가 대단하고 감사하지만 당시엔 병원에 가는 게 싫었다. 내가 파둔 우울의 우물이 너무나도 깊어서, 그곳에서 빠져나올 생각조차 없었기에 더 그랬다. 병원에 간다 한들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정말 억지로 억지로 발걸음을 했다.


 마음의 준비도 없이 어리바리 가서 더 그랬는지 몰라도 첫 진료부터 버겁게만 느껴졌다. 선생님이 심리 검사를 해보자고 하시며 두꺼운 문항지를 주셨다. 꽤 오랜 시간 동안 피곤한 얼굴로 문제를 풀어나갔다. 개중에는 그림 검사도 있었다. 그림 검사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평소의 미술 실력을 뽐냈는데, 선을 깔끔하게 긋지 않고 여러 번 그어서 그림을 완성시키는 것을 보시며 선생님은 '완벽주의 성향이 있다'고 해석하셨다. 틀린 말씀은 아니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을 때부터 나는 퉁명스러워졌다. 평소 내가 인물화를 그리는 방식일 뿐이었는데. 내가 이 검사의 성격에 맞게 그림을 그리지 못한 것 같다는, 무언가 실수한 것 같다는 생각 역시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어쩌면 이 마저도 완벽주의 성향이었을지 모르겠다만.)

 나를 더 괴롭게 한 건 선생님과의 상담이었다. 지금까지 힘들었던 일들을 말해보라고 하시기에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를 했다. 삼십 대가 된 지금도 입에 달고 사는 말이지만, 나는 말을 잘 못한다. 미리 준비해둔 말만 그나마 할 줄 알고 갑작스럽게 해야 하는 말은 거의 횡설수설하는 편이다. 그런데 그날은 첫 진료였고, 나는 어떤 걸 준비해 가야 하는지 몰랐고, 굳이 질문에 답하자면 '힘들었던 일들'이 너무 많았기에 "이런 일도 있었구요. 저런 일도 있었어요. 이런 것 때문에 힘들고, 저런 것 때문에 힘들어요." 하는 식으로 선생님께 말씀을 드렸다. 그러면 선생님이 다시 나에게 질문을 해왔고, 나는 그것에 대답하는 식으로 상담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상담이 진행될수록 선생님의 표정이 안 좋아지시더니 급기야 짜증 투로 말씀하셨다.

"아니, 아까는 그런 일에서 이런 감정을 느꼈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말이 또 다르네요? 어째 앞, 뒤가 자꾸 달라요."

 맞다. 나는 우유부단한 사람이라서 누군가 질문을 하면 "어? 그런 것도 같고요...","앗, 맞아요. 그렇기도 해요."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때는 어렸을 때라 더 그랬, 선생님이 나의 병명을 진단하여 약을 처방해야 하는 처지라는 사실도 잘 인지하지 못했다. 병원 진료보다는 상담의 개념으로 알았던 것이다. 그런 나를 보며 선생님은 눈치를 주기 시작했다. 내가 또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보는 소심한 아이였던지라 선생님의 태도는 내게 큰 상처가 되었다. '나는 우울함이 넘쳐서 병원까지 와야 하는 존재인데, 선생님께 내 이야기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줏대 없고, 똑 부러지지 못하고, 문제의 의도도 파악을 못하고, 그림 하나도 제대로 못 그려서 이상한 해석이나 듣고...' 같은 생각을 했다. 여러모로 자괴감만 가득했던 치료였다.


 자괴감에 정점을 찍은 건 수납 때였다. 엄마는 첫 병원비로 몇 십만 원의 돈을 결제했다. 검사까지 한 데다가 보험 처리를 안 했기 때문에 병원비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당시 나의 우울증, 스트레스의 원인 중 '돈'도 꽤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나는 병을 고치러 왔다가 스트레스만 더  꼴이 되었다.

 선생님은 얼마 치의 약을 지어주신 뒤 다 먹으면 다시 오라고 하셨다. 가야 하는 날짜가 다가오자 부모님께 가기 싫다고 말씀드렸다. 온정아, 그래도 뭐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니. 몇 번만이라도 더 가보자. 걱정하는 부모님의 얼굴을 보며 결국 두세 번 정도 더 갔던 것 같다. 대기실에서부터 무슨 말을 할지 정리해보고, 진료실 문을 여는 순간에는 바짝 긴장했다. 상담을 오래 할수록 진료비가 더 많이 나올까 봐 걱정하면서 준비해온 말들을 급하게 나열했다. 그건 그거대로 선생님을 만족시키지 못했던 것 같다. 약의 효과없었다. 양질의 상담과 제법 오랜 기간의 약물 치료가 맞물려야 정신이 나아질 수 있다는 사실은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다.


 다시 최근으로 돌아와서, 3년 전쯤이었다. 불안 장애 일상생활이 버거워질 지경에 이르렀다. 더 심해지기 전에 하루빨리 치료를 받고 싶었음에도 과거의 치료 기억이 발목을 잡아서 병원에 갈 엄두가 안 났다. 여기저기 알아보니 보건소에 가면 국가에서 지원해주는 무료 심리 상담 프로그램이 있다고 했다. 직장과는 거리가 좀 있길래 휴가까지 쓰고 그곳으로 향했다.

 어리숙한 상담사가 날 맞이했다. 그리곤 아직 상담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만족도 설문 조사 종이부터 나에게 내밀었다. 그 설문을 잘 체크해주어야만 본인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친절한 분이었으나 형식적인 친절이었다. 최대한 편하게 나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셨는데, 죄송하지만 나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그 시간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이런 이야기들은 친구에게도 가족에게도 다 할 수 있는 이야기인데. 그들은 나를 더 잘 알고 더 좋은 이야기들을 해주는데. 내 앞에 앉아있던 상담사는 어색한 얼굴로 '그러셨군요.', '힘드셨겠어요.'만 반복할 뿐이었다. 난 지금 느긋하게 수다  여유가 없는데. 당장 공황장애로 한 번씩 숨이 막히는데. 이 상담실 문을 나서면 다음 상담까지 2주를 기다려야 했다. 2주 동안 나는 또 숨 막히는 시간을 보내야 했고, 2주 뒤에 또 휴가까지 내고 상담실에 와서도 어색하게 나의 이야기만 하다가 가게 될 것 같았다.

 아, 나에겐 상담이 아니라 치료가 필요한 거구나. 그때 확실히 구분이 되었다. 지금 나에게는 약이 필요하고, 어떤 약이 적절할지 진단하여 처방해줄 수 있는 의사 선생님을 찾는 게 급선무라는 것을.


 인터넷으로 여러 병원의 후기들을 찾아보았다. 치료하러 갔다가 또 상처를 받고 싶진 않았다. 큰 욕심은 부리지 않기로 했다. 혹여나 딱딱하게 진료하시더라도 과잉진료 없이, 나에게 맞는 약을 찾아주실 선생님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 어떤 선생님의 후기가 눈에 띄었고, 나는 그 선생님이 계신 정신의학과의 문을 두드렸다. 그곳이 바로 지금 다니고 있는 M 정신건강의학과다.


 M 병원에 처음 간 날, 접수를 한 뒤 곧바로 심리 검사지를 받았다. 움찔하면서 받아보니 세 장 짜리 간단한 문항지였다. 이건 얼마 짜리일까? 간단한 거니까 그리 비싸지는 않겠지?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당시 나는 치료 의지가 강했으므로 비장한 마음으로 작성했다. 그리고 대기실에 앉아서 몇 시간을 기다리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선생님은 과연 어떤 분일까. 온종일 이렇게 많은 환자들을 진료하시다 보면 진이 빠지실 것 같은데, 괜찮으신가?(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하지만 지금도 병원에 갈 때마다 나는 선생님을 걱정한다.) 날 진료하실 때쯤엔 지칠 대로 지치셔서 대충 봐주시는 거 아니야? 제발, 그러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긴장한 채로 진료실 문을 열었을 때, 선생님은 활짝 웃으며 나를 맞이해주셨다. 가볍게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셨지만 선생님의 얼굴에는 무언가 많은 말들이 담겨있는 것처럼 보였다. 잘 왔어요. 반가워요. 내가 다 들어줄게요, 같은 말들.

 선생님은 그런 분이셨다. 표정으로 이야기하시는 분. 표정은 말 보다간접적인 표현 방식이라 더욱 다양하게 해석이 되었다. 선생님의 표정을 보며 나는 그 짧은 상담 시간 중에도 스스로 고민하는 법을 배웠다. 선생님은 답을 정해주거나 조언을 해주기보다는 내가 스스로 길을 찾아가도록 도와주시는 쪽이었다.

 선생님은 생김새도 무척 온화하셔서, 만약 연기를 하셨다면 착하고 청순한 배역을 도맡아서 하셨을 것만 같다. 그런데 평소 천사같이 진료를 봐주시다가도 단호하실 때는 또 무척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걸 보 정말 프로페셔널하다고 느다. 이러니 그 힘든 정신의학과 전문의를 하실 수 있는 거겠구나, 싶기도 하고.


 첫 진료가 끝날 무렵, 선생님께 어릴 때 정신의학과에 갔던 경험을 말씀드린 뒤 감사하다고, 정말 감사하다고 여러 번 인사를 드렸다. 그 기억 때문에 여기 오기까지 큰 용기가 필요했는데 잘 왔다는 생각이 든다고. 이제야 안심이 된다고. 나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으시던 선생님의 미간이 눈에 띄게 찌푸려졌다. 입 밖으로는 정제된 말만 뱉으셨지만 표정으로는 분명히 과거의 그 선생님을 향해 화를 내고 계셨다. 그게 참 고소했다. 이곳을 용케 찾아온 내가 승자처럼 느껴졌다. 선생님께 온전히 마음을 맡기고 치료받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저 앞으로 치료 열심히 받을 거라고 말씀드린 뒤 진료실을 나왔다.

 그날 병원비는 2만 원쯤 나왔다. 처음이라 상담 시간이 제법 길어서 그랬던 것 같고, 그 뒤로는 만원을 넘지 않다. 나는 이 진료가 만원의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3년 동안 계속 치료를 다닌 건 아니었다. 중간에 임의로 치료를 중단했던 적도 있고, 재발하는 바람에 지금은 다시 병원에 다니고 있다. 병원에 다니는 동안 나의 정신 건강은 아주 조금씩 차근차근 좋아지고 있다. 처음 갔을 때와 비교해보면 큰 발전이다.

 무엇보다, 마음이 힘들 때면 곧바로 생각나는 정신의학과가 있다는 사실이 어찌나 든든한지 모른다. 큰일 안나. 분명히 이겨 낼 방법이 있을 거야. 선생님이랑 이야기해봐야겠어.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혹시 정신의학과를 가는 게 두려운 사람이 있다면, 또는 용기 내어 정신의학과에 갔다가 도리어 상처를 받고 '다시는 병원 안 가.', 하는 사람이 있다면 조금만 더 맞는 병원을 찾아보시라 권하고 싶다. 좋은 선생님을 나서 정착한 나 보며 용기를 얻으셨으면 좋겠다.

병원에 빽빽하게 앉아서 대기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종종 생각한다. 요즘 세상에 온전히 멀쩡한 정신으로 살아가는 게 어찌 쉽겠어?라고. 마음 나눌 친구를 한 명씩 사귀듯, 모두들 힘들 때 방문할 정신의학과 하나 정도는 터 놓으면 좋겠다.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 그거 생각보다 인생에 훨씬 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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