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화 기능이 좋지 않으므로 어떤 음식이든 꼭꼭 씹어서 삼키려 노력해야 한다. 먹는 행위 자체에 남들보다 더욱더 집중해야만 탈이 안 난다.그러니 밥 먹으면서 티비를 본다거나 수다를 떠는 등의 '멀티 플레이'에도 능하지 못하다. 아무리 편한 사람과 밥을 먹어도, 중간중간 말을 많이 하면 먹던 게 금방 얹혀 버린다. 타인의 식사 속도에 맞추다가 체할 때도 많아서 차라리 일찌감치 포기하고 음식을 남긴다.
직장 생활을 할 때도 점심은 늘 도시락을 싸서 다녔다. 바깥 음식은 자극적일뿐더러,식당까지의 왕복 시간과 음식 기다리는 시간을 빼면 밥 먹을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챙겨 온 도시락마저도혼자 먹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다. 동료들과 직장 돌아가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나누는 것도 좋지만,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차분하게먹는 일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그래서 백수가 되어 집에서 생활하는 동안 줄곧 혼자 밥을 먹으며만족했다. 혼자이기에 메뉴를 고르고 밥을 차리는 일은 더 귀찮았지만, 혼자 밥을 먹는다고 해서 외로웠던 적은 거의 없었다.소소한 밥상이라도 오물거리며 차분하게 먹으면 1시간이 걸린다. 지루할 시간일랑 없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는 즐거움, 그걸 모르는 건 결코 아니다. 좋은 걸 먹으면 자연스레 가족들과 친구들 생각이 난다. 신랑과 평일 저녁에 가끔 특식을 사 먹거나 주말에 맛있는 걸 해 먹는 것도 내 일상의 가장 중요한 이벤트 중 하나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나에겐 한 번씩 혼자 먹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이러니 나는 '진심으로' 혼자 밥 먹는 걸 좋아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혼자 밥 먹는 걸 좋아한다고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는 이유는 엄마가 나의 말을 도통 믿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진짜라니까. 정말이라니까요.정말 진짜 저는혼자 밥 먹는 게 좋다니까요? 아무리 이야기해도 엄마는 "에이, 그래도..."를 붙이신다.
에이, 그래도 엄마는 네가 혼자 밥 먹는 게 제일 마음에 걸려. 엄마 밥 먹을 때마다 우리 딸 밥은 잘 챙겨 먹고 있나, 매일 혼자 밥 먹는데 외롭지 않을까 걱정되고 궁금하고 그래.
엄마의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진짜로'만 몇 번을 외치다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내 마음을 꺼내보여 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엄마의 끝도 없는 딸 걱정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엄마의 밥 걱정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엄마의 수첩 속에서 보았던 글이생각난다. 엄마가 주제 하나를 정해두고 연상되는 것들을써내려 간 수첩이었는데, '밥'이라는 주제 아래 적어두신 글들을 보고 마음이 뭉클해졌었다.
<밥> 밥은 엄마의 사랑이다. 기다림이다. 그리움이다. 정성이다. 고단함이다. 사무침이다. 마음이다. 행복이다. 따뜻함이다. 가족을 하나로 모으는 힘이다.
어린 날 매서운 바람 속에 학교 다녀온 뒤 이불속에 꼭꼭 묻어 놓은 밥그릇을 보면 엄마의 품처럼 따뜻했다.
오랫동안 헤어져있던 자식에게 가장 해주고 싶은 게 뭐냐고 묻는다면, 엄마들은 하나같이 따뜻한 밥을 먹이고 싶다 한다. (...)
이 글을 본 뒤로 엄마가 밥을 통해 표현하는 사랑에 대해 더 깊이 느끼게 되었다. 여느 때와 같이 전화기 너머로 내가 혼자 밥 먹는 게 걱정된다고 말씀하시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그러게. 밥은 엄마의 사랑이니까. 엄마는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내가 오늘 세 끼를 즐겁게맛있게 든든하게 잘 먹었는지가 가장 궁금하시겠구나.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 게다가 엄마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 보니, 나와는 다르게 엄마는 혼자 밥 드시는 걸 쓸쓸하다고 느끼시는 것 같았다. 내가 아무리 괜찮다고 말해도 믿지 못하시는 이유는 당신이 괜찮지 않기 때문이었다. 혼자 드실 때마다 쓸쓸하니까. 우리 딸도 당연히 쓸쓸하겠거니, 그렇게 날 떠올리신 것이다.
내가 부모님과 살 적에 우리 집 식탁은 늘 소란스러웠다. 은퇴한 중년의 부부 사이가 의외로 어색한 경우도 많다고 들었다. 그에 반해 엄마와 아빠는 어색한 사이가 아니다. 오히려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굳이 공유하다가 의견이 부딪히고, 그래서 자주 티격태격하신다. 마음이 통하든 통하지 않든 일단 대화는 많이 하시는 것이다. 그런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그릇에 코 박고 밥 먹던 나는 "제발 밥 좀 조용히 먹자"며 짜증을 내기도 했다.
은퇴하신 뒤로 아빠는 집에 가만히 있으면 몸이 근지러워서 참을 수가 없다며, 아침부터 동사무소니 학원이니 부지런히 나가신다. 집에서 엄마와 아침을 드시지만 점심은 밖에서 사 드신다고 한다.엄마는 혼자 남아 평화롭게 책 읽고 산책하며 나름대로 그 시간을 즐기시지만, 고요한 식탁에서 혼자 밥 드시는 것만큼은 그리 달갑지 않으신 모양이다. 외식하고 들어오시는 아빠를 향해 가끔 투덜거리시기도 하신단다. 아무래도 엄마는 그동안 정성으로 차린 밥상을 식구들이 떠들썩하게,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마음의 빈틈들을 메워오셨던 것 같다. 그 순간순간마다 통통하게 꽉 찬 마음을 발판 삼아 다음 식탁을 준비하셨나 보다. 삼십여 년의 세월을 그렇게 보내고 텅 빈 식탁에 자신만을 위한 밥상을 차리는 일이 여전히 영 어색하고 썰렁하실 만도 하다.
그러고 보니 엄마의 글이 정말 맞다.
밥은 엄마의 사랑이고, 기다림이고, 그리움이고, 정성이고, 고단함이고, 사무침이고, 마음이고, 행복이고, 따뜻함이고, 가족을 하나로 모으는 힘이다.
이번 주말에는 부모님과 오랜만에 한 식탁에 한데 모여 맛있는 거 먹어야겠다. 평소에도 엄마가 부디 쓸쓸하지 않기를. 혼자서라도 즐겁게, 맛있게, 든든하게 드시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내가 아무리 괜찮다고 말해도 엄마가 계속해서 나를 걱정하실 때면, 혹시 당신이 힘드신 건 아닌지 잘 살펴보는 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