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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정 Sep 25. 2019

다들 그 고충을 어찌 견디나요?

전공, 그 족쇄에 대하여

"온정아, 넌 무슨 과야?"
"고분자공학과요."
"뭐? 복분자??? 그게 뭐야?"


 이것은 아재 개그가 아니다. 실제로 고분자를 전공하는 6년 내내 사람들에게 종종 듣던 질문이다. 이 생소한 이름의 학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봤자 큰 의미는 없으니 그냥 화학계열이라고 일러두겠다.

 중학생 때부터 화학에 많은 흥미를 느꼈던 나는, 원하던 대로 화학 관련 학과에 입학했다. 전공 공부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재미있는 편이었고, 내 적성에 잘 맞는 듯했다.


'안 그래도 잘하는 것 하나 없는데, 전공이나 잘 살려보자!'
 결국 나는 대학교 3학년 때 석사 진학을 결정하여, 일찍부터 연구실에 들어가게 되었다.

  내가 연구실에서 느낀 것은 이론과 실전의 큰 괴리였다. 학문은 학문이고, 막상 연구는 노동에 조금 더 가까웠다. 무엇보다 내가 크게 간과한 점이 있었다. 책에 그려져 있는 화학 기호들은 그냥 그림일 뿐이지만, 그 화학물질을 실제로 다룰 경우 몸에 매우 해롭고 위험하다는 사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당연한 것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 참 바보 같지만, 그때는 생각이 거기까지 닿지 못했다. 수업 시간에야 방법이 모두 정해져 있는 간단한 실험만 하니까 말이다.

 난 그저 흰 실험복을 입은 채, 한 손으로는 플라스크를 높이 쳐들고, 그 안에 담긴 액체를 관찰하는 연구원에 대한 환상 같은 게 있었다. (실제로는 플라스크를 눈 앞에서 그렇게 높이 들면 안 된다. 위험하다. 그리고 실험복은 흰색일 수 없다. 온갖 화학약품이 묻어 꼬질꼬질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연구실에서 3년 정도 연구를 했는데, 안타깝게도 내 몸은 화학물질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마치 미술 하는 사람이 물감 알레르기가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난 항상 화학약품에 취해 몽롱한 상태로 실험을 하곤 했고, 피부엔 트러블을 달고 살았다. 종종 역한 냄새에 헛구역질을 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매일 밤늦게까지, 혹은 밤을 새워서 실험을 하기도 했다. 이 환경으로 인해 건강이 나빠지는 것이 눈에 보였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연애를 책으로 배웠어요!"라는 웃지 못할 문구가 있듯이, "전 화학을 책으로 배웠다구요!" 라고 외치며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루는 주말에 혼자 나와서 실험을 하고 있었다. 안에 산(acid)을 포함한 화학물질들을 넣고 플라스크에 반응을 걸었다. 잘 섞이는지 보려고 얼굴을 가까이 갖다 댔다가, 이내 뒤로 돌던 찰나였다.

"쨍그랑!!!"

반응을 돌리던 플라스크가 폭발해버렸다. 플라스크 안에 있던 빨간 물질들과 파편들이 벽과 내 실험복 등짝에 튀어서 주르륵 흘렀다. 조금만 늦게 뒤를 돌았 나는......
안 그래도 매일 화학에 두려움을 가지던 차에, 이 경험은 내 마음에 끔찍한 트라우마를 남겼다. 화학은 장기적으로도, 혹은 순간적으로도 나를 해칠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건강과 맞바꾼 지옥 같은 대학원 생활을 버텨내고 겨우 석사를 졸업했다. 석사 학위라는 것이 나에게는 피나는 노력으로 얻은 표창장 같은 것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내 앞길을 정해주는 꼬리표가 달린 것 같아 조금 불편했다.


사진 출처: 나와 같은 화학의 길을 걷고 있는 남편

 졸업 후 어렵게 취직을 했다. 회사는 환경이 좀 더 낫길 바랬지만, 난 그곳에서도 같은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나 정신이 헤롱헤롱한 상태로 연구를 던 어느 날이었다.

"끼이이이익"


큰 롤 3개가 서로 맞물리며 빠르게 회전하는 장비를 쓰고 있었는데, 내 실험복 소매가 그 장비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빨려 들어가는 실험복이 내 손목을 세게 조이면서 손목까지 빨려 들어갈 기세였다. 큰 사고가 나면 그 순간이 슬로우모션처럼 천천히 흘러간다는 것을, 그때 처음 경험했다. 그 덕 큰 사고로 이어지기 전 빨간색 Emergency stop 버튼을 ''하고 누를 수 있었다. 곧이어 장비가 멈추고, 난 너무 놀나머지 다리에 힘이 풀렸다.

소리를 들은 선배가 황급히 달려오고, 나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아, 괜찮아요. 별 일 아니에요."라고 대답하고 있는 나의 입과는 반대로, 눈에서는 눈물이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사실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실험복이 아닌 손가락이 빨려 들어갔다면 나는 손을 잃었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회의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미련하기 짝이 없지만 그 이후에도 나는 매일 그 장비를 쓰며 실험을 했다. 매일 밤 누우면 그 장비에 손이 빨려 들어가는 장면이 머릿속에 펼쳐지곤 했다. 그 일이 있고 몇 개월 후에서야, 더 이상 버티다가는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아 겨우 퇴사를 결정했다. 그리고 다시는 연구직으로 취직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내가 경험해본 연구직은, '빛 좋은 개살구'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연구라는 것은 학문의 연장선이며, 머리를 많이 쓰고, 고상한 것일 줄 알았지만 딱히 그렇지 않았다. 때론 힘도 세야 하고, 세심한 동시에 과감해야 하기도 하고, 또 종종 기계와 같은 노동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일반화하려는 것은 아니다만, 내가 느낀 바그렇다는 것이다. 대학 생활 내내 학과 공부가 적성에 맞지 않아 씨름하는 친구들을 보며 '난 그나마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공부와 실전이 이토록 다를 줄은 몰랐다. 실전에 뛰어들어 아등바등하다 보니 이젠 공부한 것 마저 머릿속에 남은 것이 별로 없는 듯하다. 현재의 나는 전공을 살리면서도 그나마 몸에 덜 해로운 일을 찾아서 하고 있지만, 사실 그 마저도 쉽진 않다.


이러한 이유들로 전공은 나에게 애증의 존재이다. 그동안 "나 전공 버리고 싶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내가 밥 벌어먹고 살 수 있는 능력이 이것뿐이라 차마 놓지를 못하고 있다. 그나마 내 통장에 월급을 꽂아주게 해주는 전공에게 감사하긴 하다만. 그래도 이젠 그만 좀 헤어지고 싶다, 너.



 내가 대학원과 직장에서 힘든 일을 겪어가면서도 열심히 버텨낸 이유 여러 가지가 있만, 특히 '남들도 다하는 건데, 나도 해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 컸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난 '남들', 즉 이 세상의 모든 직장인들이 언제나 존경스럽다. 다들 각자의 일을 해내기 위해 각각의 직업병을 가지고 살 텐데, 어떻게 그것들을 다 감당하는 것일까. 피곤하게 운전을 할 때면 전국을 며 일하는 사람들이 존경스럽고, 노트북에 열심히 글을 쓰고 있자면 뒷목이 당겨오면서 사무직 사람들이 존경스럽다. 미세먼지가 심해서 콧물이 줄줄 나는 날에는 바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존경스럽고, 직장 동료에게 상처를 받을 때면 고객에게까지 상처를 받는 서비스직 사람들이 존경스럽다.


 다들 어떻게 그 고충을 버티며 살까. 나처럼 맞지 않는 일을 어쩔 수 없이 꾸역꾸역 하는 사람들이 참 많을 텐데. 그러니 나도 이런 고충을 버티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 항상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숙제이다.


이렇게 나는 지금도 삼십춘기로 방황하는 중이다. 10년, 20년이 지나도 난 계속해서 방황을 하겠지만, 적어도 그때쯤에는 내가 다른 일을 하고 있기를 소망해본다. 기왕이면 건강을 해치는 일 말고,  내가 전공보다 더욱 잘할 수 있는 일로 말이다.


도전을 두려워하는 나의 청춘이, 조금은 더 과감해졌으면.



전공, 그 족쇄에 대하여

오늘의 일상,

진로를 고민하다가 문득.

커버 사진/ 필름 카메라 OLYMPUS PEN EE-3으로 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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