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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정 Oct 16. 2019

백수가 된 후 몸살을 앓았다

마음껏 아플 권리

 오랜만에 감기에 걸렸다. 지독한 몸살까지 동반되어 함께 찾아왔다. 귀에 이명처럼 들오는 삐- 소리에 골이 흔들리는 듯했다. 세상이 눈 앞에서 팽글팽글 돌아가고 식은땀이 흘렀다가 오한이 나서 추워졌다가를 반복했다.

결국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침대와 한 몸이 되었다. 가만히 누워 온몸으로 아픔을 느끼던 차에, 문득 내가 백수임에 감사해졌다. 지금 일을 하고 있었다면 이 아픈 몸을 끌고 출근을 했겠? 나는 침대에 엎어져서는 얼굴을 베개에 묻은 채 일터에서의 내 모습을 떠올렸다. 두 가지 에피소드가 머리 위로 뭉게뭉게 떠올랐다.

첫 번째 에피소드,
생리통이었는지 몸살이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만. 어찌 됐든 눈뜨자마자 몸이 무거운 것이, 느낌이 별로 좋지 않은 날이었다. 휴가를 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산더미같이 쌓여있는 일들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결국 출근을 해서 정신없이 일을 했고 오후쯤 되자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하지만 업무시간(9시~18시) 중에 해결이 가능한 정도의 일이었다면 '산더미' 같은 표현은 쓰지 않았을 것이다. 산더미에서 하루치를 뺀다고 해도 똑같은 산더미일 터. 온 힘을 쥐어짜 일을 했지만 퇴근 시간을 앞둔 내 앞에는 산더미가 그대로 진을 치고 있었다. 당이 뚝, 떨어져서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결국 컴퓨터에 야근 신청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갑자기 눈에 무언가 차오르더니 야근 신청서가 뿌옇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또르륵. 눈물의 종류 중에서도 내가 가장 싫어하는 눈물인 동시에, 어떤 눈물보다도 가장 구제불능인 눈물. 바로 '억울함의 눈물'이 시작되었다.

"에이씨. 넌 왜 또 떨어지는 거냐."
난 혼자 중얼거리며 화장실로 뛰쳐 들어갔다.
'대체 이러고 있을 시간이 어디 있어. 이럴 시간에 빨리 하나라도 더 해결해야지. 바보야. 그만 울어!!'
고개를 천장으로 치켜세우며 또르르륵 떨어지는 눈물들을 휴지로 급히 훔쳐댔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이 '억울함의 눈물'은 아주 지독해서 통제가 어렵다. 구제불능의 사전적 의미는 '도저히 돕거나 구하여 주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이니 억울함의 눈물은 나에게 정말 딱 그런 존재였다. 겨우 눈물을 멈추고 제자리로 돌아갔으나 다시금 내 볼을 타고 기계적으로 또르르륵 떨어지는 물줄기를 발견했다.

결국 이상한 낌새를 알아챈 사수가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사수는 을, 나는 병이다.)

"병님, 퇴근시간 지났어요. 퇴근 안 해요??"
"(침묵)"
"????? 아니 왜 울고 있어요???"
"을님, 저, 일이 너무 많아요......."
"아니, 일이 많은 건 알지만 그렇다고 울면 어떻게 해요."
"을님, 제가 설마 일이 많아서만 울겠어요? 제 지금 상황이 너무 억울하잖아요. 저 오늘 몸이 아파서 너무너무 힘든데, 일이 너무너무 많아서 야근을 해야만 해요. 다른 동료들은 지금 일이 없다고 투정을 부리는 판에, 다른 동료들은 아프면 당일날 전화로 연차를 쓰는 마당에, 저만 너무 불공평해요. 제 상황이 너무 힘들어요!!"

아이처럼 우는 모습도 들켜버린 마당에, 나는 마치 용이 불 뿜듯 억울함을 내뿜어버렸다. 사수는 항상 본인 때문에 일더미에 눌려있는 나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마음을 알기에, 나는 힘든 티를 잘 내지 않았고 묵묵하게 일하곤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한 동료가 본인은 요즘 일이 너무 없다며 투정을 부리는 통에 내 마음속에는 화딱지가 자리 잡아버렸다. 그 화딱지는 자연히 아물기도 전에 오늘 일에 의해 뚝 떼어져 버렸다. 아, 드러난 그 상처가 너무 아파서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씩씩거리며 아이처럼 엉엉 울고 있는 나를 보며 사수는 미안해서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병님, 오늘은 일단 집에 가요."
"이미 야근 신청 올렸어요. 집에 가버리면 이 많은 일들은 또 어떻게 하고요."
"그거야 취소하면 되지! 어찌 됐든 오늘 일하는 건 반칙. 빨리 집에 가요."

그 날, 나는 결국 책임감인지 오기인지 모를 감정을 잠시 눌러둔 채 퉁퉁 부은 눈으로 집으로 향했다. 그 소란을 피웠는데 참 민망스럽게도 그날 밤 약을 먹고 푹 쉬고 나니 다음날 몸이 한결 개운해졌다. 출근하고 보니 사수가 전날 밤 나 대신 일을 조금 처리해둔 것을 발견했다. 고마운 마음과 동시에 힘이 나서, 나는 다시 한번 용감하게 산더미로 돌진했다.
힘들 때면 이렇게 한 번씩 기권 카드를 쓸 줄도 알아야 하는구나. 만일 그날 오기로 야근을 했다면 다음날 아파서 출근을 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일어났을지도 모르겠다.


두 번째 에피소드,
하루는 감기에 걸린 동료 A가 내게 물었다.

"온정 씨는 완전 건강체질 같아요. 평소에 잘 안 아프죠? 어휴, 저는 잔병치레가 많아서 너무 힘들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주 조금 울컥했음을 고백한다. 나도 그리 강하지 않은 사람인데. 아니, 사실 부스러질 듯 약한 존재인데. 직장에서 묵묵하게 열심히 일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나를 씩씩한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다. 징징거리기 시작하면 봇물 터지듯 쏟아나와 한없이 약해질까 봐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나인데. A의 질문에 나는 떠오르는 대로 대답을 했다.

"어... 사실 저는 일할 때 너무 긴장하고 있어서 그런지 일할 때는 잘 안 아파요. 주로 주말이나 쉴 때 아픈 게 몰려오는 편이에요."

아차, 나도 모르게 나온 대답이었지만 뱉고 나서 조금 후회스러웠다. 마치 동료에게 '당신은 긴장을 안 해서 지금 아픈 거예요.'라고 던진 것 같아서. 내 마음속에 그런 의도는 없었고, 더군다나 A에게 상처를 주고 싶은 마음도 일체 없었는데 말이다. 오해하기 딱 좋은 말을 뱉고 나니 마음이 아주 불편해졌고 소심한 나는 계속해서 머리에 그 대답을 떠올렸더랬다.

'A는 그 순간 분명 날 재수 없다고 생각했을 거야. 다시 생각해도, 나 아픈 사람 앞에서 너무 건방졌어.'

그런데 퇴사하고 나서 이렇게 온몸으로 아프고 나니 내가 했던 말이 재수 없는 말이 아니라 진실이었음을 느낀다. 누울 자리 봐 가면서 발 뻗는다고, 내 몸도 다 알았던 것 같다. 온몸을 긴장과 정신력으로 무장했으니 아파도 아픈 줄 모르고 지냈던 게 아닐까. 내가 지금 일을 다니고 있다면 이렇게나 맘껏(?) 몸져누울 수 있었을까? 온전히 이 아픔을 느낄 수 있었을까? 감기로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도 눈에 힘을 주고 일을 했을 내가 떠올랐다.

아마 이번에 내 몸을 침투한 감기 바이러스에게 입이 있다면 이런 대화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친구 지금은 좀 아파도 돼. 우리가 쳐들어가서 이 친구 좀 하루 종일 눕혀놓자. 평소 얼마나 철벽을 쳐놓고 치밀하게 굴던지, 한동안 한 번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잖아. 지금이 기회야!!"



대체 그동안 얼마나 긴장을 하고 지냈던 건지. 어쩐지 퇴사를 앞두고, 남은 연차를 하루씩 쓰는 날이면 나답지 않게 계속해서 잠이 쏟아졌더랬다. 왜 그렇게까지 무기력해지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늦은 시간에야 겨우 눈을 뜨고, 밥을 먹고 나면 어김없이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잠만 자는 나 자신이 괜히 한심해 보이기도 했는데 이제 보니 그동안의 긴장이 슬슬 풀리는 과정이었구나.

가만히 누워 아픔을 느끼는 이 시간조차도 왠지 감사한 마음이 드는 날이다. 다시 직장인로 복귀하는 그 날까지, 쉬는 동안 혹시 아프더라도 속상해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껏 아픈 것.
이 또한 백수로써 느낄 수 있는 하나의 권리일 테니까.



오늘의 일상,

앓아누워있다가 문득.

커버 사진/ 필름카메라 MINOLTA X-300으로 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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