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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가족 Oct 06. 2022

내가 '다시' 베로나에 간 까닭은

이탈리아 베로나, 이번에는 자발적 여행기

(이전 이야기) https://brunch.co.kr/@travelnread/139



18년. 그렇다. 어감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것이 유감이지만 여하튼 딱 18년이 걸렸다. 이탈리아 베로나(Verona)로 돌아가기까지.


나의 마음속에 이 도시가 내내 머물러 있었것이 분명했다. 프랑크푸르트발 로마행 기차 소매치기 사건 이후에도 유럽엔 일로 때로는 여행으로 여러 차례 드나들었고 같은 대륙의 또 다른 나라에서는 아예 장기체류를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베로나에 대해서만큼은 냉큼 다시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반 조금 더 아껴두고 싶은 마음이 반이었다. 어쩌면 난, 이 꿈같은 도시를 사랑하는 이와 함께 만끽할 날을 고대하며 시간을 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목적지에 베로나라는 글자가 선명한 기차표를 다시금 손에 쥐던 날,  마음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지금의 나는 20대 초반, 베로나를 처음으로 방문하던 날의 나와는 다르지 않은가. 세월이 나에게만 허투루 흐른 것은 아니어서 이런저런 경험도 많이 쌓였겠다 일을 하면서 모아 놓은 돈도 있겠다 만에 하나 예상치 못한 사건이 벌어진다 해도 머리를 맞대고 해결법을 고민할 배우자와 함께였겠다, 이번에야말로 그저 행선지만 잘 보고 기차에 올라타면 자동으로 도착하는 곳이 베로나가 될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날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사실 지금 당장 그 이야기를 꺼내고 싶어 입이, 아니 손이 근질근질해 못 참을 지경이다. 하지만 18년 전 소매치기 사건 뺨 때릴 기세로 험난했던 그 사연을 풀어놓기 시작하면 이 글을 끝맺을 때까지 베로나에 도착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하기에 넋두리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일단 2019년 8월의 어느 날, 우리 가족이 베로나에 도착한 순간으로 이동해보겠다.


베로나 역을 나서는 이들의 눈을 가장 먼저 사로잡는 것, 그것은 아마도 오페라 페스티벌을 상징하는 거대한 조각상일 것이다.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도 상황은 마찬가지. 베로나 시내 곳곳에는 오페라 페스티벌을 알리는 홍보물이 걸려 있었고 공연장인 아레나 디 베로나(Arena di Verona, Verona Arena) 둘레로는 무대에 설치될 차례를 기다리는 거대한 장식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그즈음의 베로나는 말 그대로 오페라 페스티벌이라는 강력한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하나의 우주였다.


이탈리아의 작곡가인 주세페 베르디(Giuseppe Fortunino Francesco Verdi)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1913년 8월 10일에 처음으로 개최된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Arena di Verona Opera Festival)은 매년 6월부터 9월까지 베로나 중심에 자리한 아레나 디 베로나에서 진행된다. 매년 여름이면 로마시대에 지어진 이 아름다운 원형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까만 밤을 수놓는 화려한 무대와 아름다운 오페라 선율에 흠뻑 빠지는 것이다.

우리 가족을 베로나로 이끈 가장 중요한 이유도 다름 아닌 이 오페라 페스티벌이었다. 공연이 매일 저녁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시간에 시작되어 자정을 넘겨 끝나기 때문에 숙소는 아레나 디 베로나에서 걸어서도 쉽게 갈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에 잡았다.


낮이면 우리는 오래된 돌길을 걸어 시내를 산책했다. 미술관에 가고 성도 구경했다. 자그마한 테이블 하나 펼 자리만 있으면 어디에서나 음식을 내는 듯 도처에 즐비한 레스토랑 중에 한 곳을 골라 맛있는 요리도 즐겼다. 베로나에서는 어디에서 무얼 먹어도 맛있었다. 슈퍼에서 산 방울토마토를 거리에 앉아 먹더라도 산해진미처럼 느껴졌던 것은 어쩌면 우리의 기분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면 우리 셋은 땀에 전 옷을 벗어던지고 샤워를 한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설레는 발걸음으로 공연장으로 향했다.


가장 비싼 좌석은 무대 바로 앞, 오케스트라석 근처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멋진 드레스와 턱시도로 한껏 멋을 낸 이들이 앉아 있었다. 여름밤, 살랑거리는 드레스를 입고 아레나 디 베로나에 앉아 있는 기분은 어떨까. 그 기분이 탐이 나 우리도 저기, 바로 저 VIP 좌석을 예매하자고 주장하고 싶었다. 하지만 잠깐. 아직 만으로 네 살 밖에 안 된 여행이가 공연 중간에 나가고 싶어하거나 큰 소리를 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했다. 그래서 아쉽지만 우리 가족은 입장료가 가장 저렴한 돌계단 위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자리가 어디였든지간에 오랜만에 찾은 아레나 디 베로나는 여전히 가슴 벅차도록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를 반겨주었다. 먼 과거,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인 기원 후 30년에 만들어졌다는 건축물에 앉아 그 공간을 채운 오늘날을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과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머리 위 뻥 뚫린 하늘 높이 높이로 울려 퍼지는 황홀한 음악에 온 귀와 마음을 기울인다는 것. 그날 밤 우리가 느꼈던 시공간을 초월한 기쁨을 고스란히 전할 문장을 나는 도저히 쓸 수가 없다.


엄마, 아빠의 우려를 짐작했는지 참으로 고맙고도 미안하게 여행이는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아가며 오페라를 관람하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한낮의 태양은 여전히 따가웠지만 밤의 아레나, 그 돌바닥은 차가웠기에 남편과 나는 인터미션 동안에도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고 아이를 내내 우리의 무릎 위에 눕힌 채로 안고 있었다. 어깨와 손은 이미 감각을 잃은 지 오래였다. 하지만 다시금 찾아온 베로나에서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남자와 함께 그토록 보고 싶었던 오페라 페스티벌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베로나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이 된 도시로도 유명하다. 골목길을 돌고 돌아 닿을 수 있는 줄리엣의 집(Casa di Giulietta, Juliet's House)은 사랑을 고백하거나 누군가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가 닿기를 빌기 위해 방문하는 이들로 언제나 북적인단다.

첫 번째 방문에서는 찾아갔던 줄리엣의 집을 두 번째 베로나행에서는 방문하지 않았다. 왜냐고? 나는 이미 사랑을 이뤘으니까. 하지만 다음번, 그러니까 이 멋진 도시에서 한 달 이상을 머물며 오페라 페스티벌을 여유 있게 즐기겠다는 꿈을 이룰 세 번째 방문에서는 줄리엣의 집을 다시금 방문할 것이다. 가서 우리 아이행복한 사랑을 하게 길 빌어줄 것이다.

우리 여행이, 올해로 여덟 짤. 내가 너무 앞서 나갔나?


두 번째 베로나 방문의 이유.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 이번에는 안 졸았다. 아싸!

여행 


베로나 여행은 베로나 역(Verona Porta Nuova)에서 시작된다. 가까이로는 이탈리아 베네토(Veneto) 지역의 크고 작은 도시에서부터 멀리로는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 유럽의 다른 나라까지를 잇는 기차가 하루 종일 베로나 역을 드나든다. 역 외부에는 버스터미널이 자리하는데 이곳에서 베로나 시내는 물론, 지역 내 다른 도시들로도 쉽게 이동할 수 있다. 베로나 역에서 베로나 시내 중심가까지는 버스로 약 10분 소요.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Arena di Verona Opera Festival) 이탈리아 출신의 세계적인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Giuseppe Fortunino Francesco Verdi)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1913년 8월 10일 시작되었으며 이후 매년 6월 중순부터 9월 초순까지 이탈리아 베네토주 베로나에서 열린다. 모든 공연은 저녁 시간에 아레나 디 베로나에서 시작되어 보통 자정을 넘긴 시각에 끝나므로 공연장 근처에 숙소를 잡아두면 편리하다. 아래의 공식 웹페이지에서 축제 무대에 오를 작품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티켓 예매도 가능하다.

https://www.arena.it/en/arena-di-vero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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