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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가족 Oct 08. 2022

낭만의 도시에도 비정함은 있더라

프라하 밤의 음악회

"깎아줄게요. 싸게 싸게."


어디선가 들려오는 우렁찬 한국말 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우리는 체코 하고도 프라하(Praha, Prague)의 거리 한복판을 걷던 중이었으니까.


독일의 드레스덴을 출발한 기차에 몸을 싣고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 도착한 날이었다. 구시가지 광장의 숙소에 짐을 부린 우리 가족은 피곤한 줄도 모르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미로처럼 좁고 구불구불한 구시가지의 골목을 걷는 길, 발 밑으로 느껴지는 오래된 돌길이 벌써부터 우리에게 말을 거는 듯했다. 양쪽으로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건물과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고 그 거리를 메운 수많은 이들은 가다 서다를 반복해가며 유리창 너머에 진열된 기념품이며 보석, 먹거리나 인형 등속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우리만 앞만 보며 빠르게 걸을 이유는 없었다.


그러고 보면 이 여행을 떠나오기 전, 서울에서의 일상을 보내던 우리는 내 눈앞의 지하철을 놓치지 않기 위해, 지금 내 앞에 끼어들려는 차에게 길을 내주지 않기 위해, 퇴근 시간 전까지 하던 일을 다 끝내 놓기 위해, 그리고 늦지 않게 아이를 데리러 어린이집으로 달려가기 위해 늘 앞만 보며 빠르게 빠르게 매일을 살지 않았던가. 일상에서 벗어난 시간을 꿈꾸며 이 오래된 도시로 흘러들어온 여행자들에게는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아니, 마음의 여유를 만끽할 권리가 있었다. 그리 다행히 낭만의 도시, 프라하엔 볼거리가 차고 넘쳤다. 그 길을 느릿느릿 걷던 중 누군가가 우릴 향해 외치는 소리가 귀에 들어온 것이었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전혀 한국인처럼 생기지 않은 아저씨 한 분이 그래, 당신, 바로 당신들이라는 표정으로 우리 셋을 향해 이리 오라 손짓하고 있었다. 어디론가로 급하게 가야 할 일도 없었던 우리는 흔쾌히 그 방향으로 걸어가 보았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아저씨 옆에는 작은 테이블이 하나 있었고 그 위엔 음악회 티켓과 더불어 리플릿이 놓여있었다. 우리더러 그날 저녁 이 성당에서 진행되는 음악회를 보러 오라는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아저씨 뒤로는 성당으로 이어지는 입구가 보였는데 규모가 크진 않았지만 프라하의 많은 것들이 그러하듯 멋스럽게 낡은 건물이었다. 보통 그런 건물들은 사람을 향해 이리 오라 유혹의 손짓을 보내고 나는 종종 그 손짓에 넘어가곤 한다.


어쩌면 동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일지도 모를 프라하, 게다가 프라하 관광의 중심지인 구도심에 자리한 수 백 년 역사를 자랑한다는 작고 예쁜 성당, 그리고 그곳에서 진행되는 늦은 저녁의 음악회라니! 나의 눈에서 관심을 읽은 아저씨는 점점 더 적극적으로 변해갔다. 내 얼굴 앞에서 리플릿을 쫙 펼치더니 그것을 펄럭거리며 지금 자신이 우리를 '초대'하려는 음악회가 얼마나 대단한 이벤트인지 설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예상 가능하게도 이야기는 나를 황홀경에 빠뜨리고 말았다.


하지만 당장 지갑을 열 수는 없었다. 우리 부부 둘만의 여행이었다면 길게 민할 것도 없이 티켓을 샀을 테지만 우리는 아직 만으로 다섯 살이 되지 않은 여행이와 함께였기 때문이다. 여행이처럼 어린아이의 입장에서 실내에서 진행되는 음악회에 참석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지루한 일일 지를 생각해 보니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저씨는 역시 프로였다. 우리의 마음을 간파한 그는 인심도 넉넉하게 할인가를 제안했다. 만에 하나 여행이가 너무 힘들어할 경우 음악회를 끝까지 못 보고 나와도 돈이 많이 아깝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가격이었다.


고민 끝에 그날 밤에 진행되는 음악회 티켓을 손에 쥔 우리는 프라하 산책을 이어나갔다. 로맨틱한 도시의 로맨틱한 음악의 밤을 떠올리니 발걸음마저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프라하의 낮도 좋지만 한시라도 빨리 이 도시에 밤이 찾아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고대하고 고대하던 시간이 되었다. 설레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나를 향해 남편은 가격은 정직하다, 우리가 낸 티켓 가격을 생각해라, 수준 높은 음악회를 기대하지는 말라 조언했지만 기대로 한껏 부풀어 오른 나의 마음에 그런 소리가 들어올 자리는 없었다. 무대가 잘 보이는 좌석을 찾아 앉은 나는 곁에 앉은 여행이에게 속삭였다.


"음악회가 진행되는 동안 엄마가 안아줄 테니까 졸리면 자도 돼. 혹시 안 졸리면 함께 음악을 듣자. 조용히 음악 감상 잘하면 이거 끝나고 호텔로 돌아가서 네가 보고 싶은 동영상 하나 틀어줄게."


그러나 바이올린 연주자가 활을 놀리는 순간!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은 성악가가 첫 음을 내는 순간! 아, 나는 깨닫고 말았다. 취미로 음악 하시는 분이 자기 집 거실에서 친구들을 초대해서 진행해야 할 무료 음악회에 내가, 아니 우리 셋이 돈을 내고 들어왔구나. 이 로맨틱한 도시가 이렇게 비정해질 수도 있다니.


이어지는 시간은 고통스러웠다. 여행이도 힘들었겠지만 그런 아이를 어르고 달래며 혹시나 하는 기대에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던 나에게도 참말로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아까 돌아다니다 보니까 구도심엔 성당도 많고 밤의 음악회를 여는 곳도 여러 곳이고 또 어떤 곳은 무료로 연주회를 진행하기도 하는 데다 훌륭한 연주도 많다는데 나는 왜! 피 같은 내 돈 인당 삼 만원 도합 구 만원을 내고 여기에 앉아 있는가!


억울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한 그날의 기억을 더듬으며 오랜만에 프라하 밤의 음악회를 떠올려 보는 아침이다. 오늘은 이 이야기를 쓰고 있다는 걸 들은 남편은 딱 한마디를 내뱉었다.


"아까운 내 돈!"


프라하 구시가지를 우리는 걷고 또 걸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더할 나위 없이 로맨틱 했는데...

여행 팁


체코의 수도인 프라하(Praha, Prague)는 유럽 연합에 속한 도시 중 열네 번째로 인구가 많을 정도로 제법 규모가 큰 곳이다. 이 도시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블타바 강(Vltava)을 독일어로는 몰다우 강(Die Moldau)이라 부른다. 맞다. 체코 출신 작곡가인 스메타나가 지은 '나의 조국' 중 가장 유명한 '몰다우'가 바로 이 강을 노래한 것이다.


프라하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비교적 일찍 항복한 덕분에 오늘날까지 과거의 모습을 많이 간직할 수 있었고 이는 오늘날 프라하가 유럽의 대표적인 관광도시로 자리매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관광지로는 구시청사와 천문시계, 프라하 성, 카를교 등을 꼽을 수 있지만 굳이 유명 관광지만 골라 찍고 돌아다니않아도 좋다. 그저 이 오래된 도시를 천천히 걸으며 골목골목 헤매 보는 것만으로도 분명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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