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인들의 행적』*이라는 책에 따르면, 오래전 흑해 연안에 살던 한 부족장의 두 아들은 사냥을 하던 중 신비한 자태를 뽐내는 하얀 빛깔의 사슴을 발견하고 뒤를 쫓기 시작했다. 결국 그 동물을 잡는 데는 실패했으나 그들은 추격 끝에 당도한 기름진 땅에 정착하였고 이후 둘 중 한 명의 후손은 마자르족이, 나머지 한 명의 후손은 정복 군주, 아틸라로 대표되는 훈족이 되었다고 한다. 이 설화에 등장하는 마자르족이 세운 나라가 바로 오늘날의 헝가리(Hungary)다.
*『헝가리인들의 행적(Gesta Hungarorum)』: 기원 후 1200년에서 1230년 사이에 중세 라틴어로 편찬되었으며 헝가리의 역사를 다루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책이다. 부다페스트의 국립 세체니 도서관(National Széchényi Library)에 소장되어 있다.
부다페스트는 다뉴브강을 중심으로 서쪽의 부다 지역과 동쪽의 페스트 지역으로 나뉜다. 강 오른편으로 페스트 지역에 자리한 헝가리 국회의사당이 보인다
마자르인들의 나라, 헝가리
헝가리는 유럽 중앙 동부에 위치한 내륙국가다. 서유럽이나 남부 유럽의 몇몇 나라들에 비하면 관광지로서 덜 알려졌지만 이 나라의 수도인 부다페스트(Budapest)만큼은 전 유럽을 통틀어서도 손꼽히는 관광지로 유명하다. 도시 일부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어 있을 만큼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특히 강가의 야경은 파리, 프라하와 더불어 유럽의 3대 야경으로도 손꼽힐 정도로 아름답다.
부다페스트는 다뉴브강*을 중심으로 서쪽의 부다 지역과 동쪽의 페스트 지역으로 나뉜다. 19세기말, 강 서쪽의 부다(Buda)와 오부다(Óbuda), 그리고 동쪽의 페스트(Pest)라는 세 개의 도시가 하나로 합쳐져 오늘날의 부다페스트가 탄생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왕궁과 관청을 비롯하여 지배계층의 저택 등이 모여 있던 부다 지역과 서민들의 주거지였다가 후에 본격적으로 개발된 페스트 지역은 아직까지도 서로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으며 다리로 연결되어 있기에 쉽게 오갈 수 있다.
이 도시에서는 여기가 마자르인들의 땅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건축물들을 종종 만나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다뉴브강과 그 주변 풍경을 조망하기 좋은 장소로 사랑받아온 어부의 요새는 고깔 모양을 한 일곱 개의 탑이 인상적인 건물이기도 한데 이 탑들은 나라를 세운 일곱 개의 마자르족을 상징한다. 뿐만 아니라 896년의 건국을 기념하기 위해 96 미터 이상 높이의 건물은 짓지 않고 있다고 한다.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규모 있는 건축물로 꼽히는 성 이슈트반 대성당과 헝가리 국회의사당 건물의 최대 높이가 96 미터인 이유다.
*다뉴브강(Danube): 독일 남부지역에서 시작되어 흑해로 흘러들어가는 강이다. 유럽에서 두 번째로 길이가 긴 강으로 거쳐가는 나라가 많다. 독일,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몰도바, 우크라이나, 불가리아 영토를 지나며 나라마다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영어식 명칭, 다뉴브 강으로 종종 불리고 있다. 독일어로는 도나우 강이라 불린다.
헝가리 국회의사당의 야경
헝가리 국회의사당
헝가리 정부는 건국 10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부다 지역에 비해 개발이 더뎠던 페스트 지역을 대대적으로 개발했다고 한다. 그 일환으로 탄생한 공간 중 하나가 헝가리 국회의사당으로 다뉴브 강변을 따라 지어진 길이 268미터, 최대 높이 96미터의 거대한 네오 고딕 양식의 건축물이다. 헝가리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건물이자 영국 국회의사당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국회의사당이기도 하다. 그 규모를 생각하면 실제 완공은 건국 1000주년을 기념하는 해로부터 몇 년이 더 흐른 후인 1902년이었다는 사실이 이해가 된다. 외벽에는 역대 통치자 88인의 동상이, 지붕에는 1년을 상징하는 365개의 첨탑이 솟아 있으며 내부 또한 각종 벽화와 조각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가이드와 함께 내부를 둘러볼 수도 있다.
헝가리 국회의사당은 자국어로는 오르사카즈(Országház)라 불린다. ‘국가의 집’이라는 의미란다. 시민과 학생들이 자국의 민주화를 위해 데모를 벌였던 1956년 헝가리 혁명의 배경도, 1989년에 이 나라가 사회주의에 안녕을 고했을 당시 그 시작점이 되어준 곳도 다름 아닌 국회의사당 앞 광장이었다고 한다. 국회의사당 건물을 배경으로 세워진 거대한 조각상이 19세기 중반, 오스트리아에 맞서 헝가리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코슈트 러요시(Lajos Kossuth)의 동상이라는 사실도 이 웅장한 건축물이 이 나라의 독립과 민주화의 역사와 얼마나 깊이 연관되어 있는지를 말해주는 듯하다.
쌀쌀한 기운이 내려앉은 어느 가을날, 헝가리 의회도서관 앞까지 나와 나를 살갑게 맞아준 참고사서, 베라 씨는 말했다. 부다페스트에 간 김에 헝가리 국회의사당을 살펴보고 같은 건물에 자리한 헝가리 의회도서관까지 방문하기 위해 찾아간 길이었다. 도서관의 역사가 어떠하길래 국가의 정치 역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일까? 나는 궁금한 마음을 안고 한 시간에 걸쳐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소수를 위한 도서관에서 모두를 위한 도서관으로
헝가리에서 가장 긴 역사를 지닌 도서관 중 하나이자 국립도서관인 헝가리 의회도서관은 입법 도서관, 특별 도서관, 공공 도서관의 역할을 두루 담당한다. 지난 1868년, 국립 박물관 건물 안에 단 두 개의 열람실만을 갖춘 상태로 개관한 후, 헝가리 국회의사당 건물이 완공된 이후인 1905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왔다고 한다. 국회의사당의 건축을 담당했던 헝가리의 건축가, 임레 슈테인들(Imre Steindl)은 처음부터 국회 건물 안에 도서관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해 설계 단계에서부터 도서관을 계획했다니 그의 혜안에 감탄하게 된다.
지금에야 대중에게 공개된 곳이지만 헝가리 의회도서관이 처음부터 모두에게 열린 공간은 아니었다. 개관 초기부터 1952년 이전까지는 관련 분야 전문가들과 국회에 소속된 이들에게만 이용이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암흑기도 있었다. 헝가리를 공산 정권이 장악했던 무렵의 이야기다. 국회가 존재는 하되 기능은 빼앗겼던 이 기간 동안 의회도서관 또한 제 기능을 잃었고 열람실 일부는 공산당 정부의 사무실로 개조되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 시기, 도서관 이용자가 거의 없었을 정도로 줄어든 것은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이후, 헝가리가 자유국가로 재탄생 함에 따라 도서관도 다행히 본래의 역할과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으며 특히 2014년에 진행된 공사를 통해 오늘날 헝가리 의회도서관은 과거의 모습을 대부분 되찾았단다. 누구에게라도 소장 자료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원칙을 지켜나가고 있는 것도 물론이다.
2022년 기준, 소장자료는 약 63만 점에 이르며 주요하게 다루고 있는 주제는 법률, 행정, 정치, 그리고 19세기부터 현대까지의 역사다. 이곳은 자국 내에서 외국어 자료 분량이 가장 방대한 도서관 중 하나이기도 하며 매년 헝가리어뿐 아니라 외국어로 된 자료도 확충하고 있다 했다.
헝가리 국회에서 생성된 문서를 보존하는 것은 도서관 설립 초기부터의 주요 목표였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헝가리 국회 컬렉션(Hungarian Parliamentary Collection)은 헝가리 의회도서관의 존재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1890년부터 체계적으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으며 소장자료는 1580년경에 만들어진 사료까지를 포함한다. 이 자료들은 대부분 디지털화되어 있으므로 도서관 웹페이지에서 살펴볼 수 있다. 상호거래협약에 의거,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 타 국가의 국회 관련 자료까지 교환, 보유하고 있는데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온라인 서적의 비중이 늘면서 오프라인 자료 형태로 수집되는 분량이 점차 줄어드는 추세라고 한다. 헝가리 의회도서관은 UN 간행물 도서관으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서는 헝가리가 UN에 가입한 이듬해인 1956년부터 UN과 더불어 ILO, UNESCO, WTO, IAEA가 생성한 자료 전체를 수집, 보관하고 있다.
헝가리 의회도서관은 희귀 도서들도 다수 소장하고 있는데 이중 대다수는 정치가이자 책 수집가였던 이그나쯔 기찌(Ignác Ghyczy)의 유산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기찌 컬렉션(The Ghyczy)에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헝가리 법률 역사에 대해 논할 때 절대 빠뜨릴 수 없는, 다시 말해, 헝가리 법의 근간이 된 Tripartitum(three part code of law) 또한 도서관이 보유한 귀한 자료 중 하나다. 1570년에 출판된, 헝가리 의회도서관이 보유한 가장 오래된 자료이기도 한 이것은 헝가리 문화부와 마이크로소프트 헝가리, 그리고 소더비가 공동으로 구입하여 도서관에 기증한 것이다. 희귀본 대다수는 디지털화되어 온라인을 통해 살펴볼 수 있지만 헝가리어로만 정보가 제공되기 때문에 외국인들이 이용하기는 쉽지 않다는 아쉬움이 있다. 직접 살펴보고 싶은 희귀 자료가 있을 경우, 사전에 도서관측과 협의하여 예약을 하고 최소 2인의 후견인을 동석시킨다면 열람이 가능하다.
누구에게나 개방된 곳이라고는 하지만 내부로 들어가기까지는 몇 가지 절차를 걸쳐야만 했다. 여권을 비롯한 국가에서 발급한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의 실물을 가지고 도서관을 찾아가 방문자 정보를 등록한 후 마치 공항 출국대에서 그러하듯 보안검색대를 통과해야만 입장할 수 있었다. 나처럼 도서관에 관한 보다 상세한 정보를 듣고 싶은 이라면 방문에 앞서 이메일 등으로 방문자 정보를 등록하고 가이드 투어를 요청할 수도 있다. 번거로운 과정이었지만 백 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것만 같은 우아한 도서관 내부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이 귀한 경험을 할 수 있다면 그 정도 절차, 두 배로 더 밟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낯설게만 느껴지던 나라, 단순히 멋진 야경으로 유명한 줄로만 알았던 건축물 한편에 이런 의미 있는 공간이 자리하고 있었다니! 이 맛에 내가 바쁜 일정으로 이동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도서관 방문만은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