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로부터 가망 없는 아내의 암을 선고받던 그 순간을 떠올릴 때, 이소베는 진찰실 창문 아래서 그의 당혹감을 비웃기라도 하듯 들려온 군고구마 장수의 목소리가 늘 되살아난다.
낭창낭창 늘어지는 남자 목소리.
군고구마, 군고구마아, 따끈따끈한 군고구마아.
“여기가… 암입니다. 이쪽도 전이가 되었습니다.”
의사의 손가락은 천천히, 마치 그 군고구마 장수의 목소리에 맞추듯이 뢴트겐 위를 더듬었다.
“수술은 이제 힘들 것 같습니다.” 하고 그는 억양 없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항암제를 투여하고 방사선을 쬐어 보기는 하겠지만.”
“앞으로” 하고 이소베는 숨죽이며 물었다. “얼마나 남았는지요?”
일생일대의 사건을 마주한 이의 마음속에서는 거센 파도가 몰아치는데 그를 둘러싼 환경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너무나도 일상적으로 흘러간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고, 아니, 누구를 탓한다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아, 이건 뭐지,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파도는 그들의 시간을 집어삼키고 그제야 인간은 구할 수 없는 답을 찾아 헤매기 시작한다.
아내는 이 세상 어딘가에서 반드시 다시 태어날 테니 자신을 꼭 찾아달라는 말을 남기고 먼 길을 떠나버렸다. 그리고 그녀의 환생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한 이소베는 인도의 바라나시로 향한다. 힌두인들의 성스러운 땅을 향해 길을 나선 이는 이소베뿐만이 아니었다.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한 채 가면을 쓰고 살아온 미쓰코, 생의 순간순간마다 동물들로부터 위로를 받아온 동화작가, 누마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정신적 상처로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온 기구치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가톨릭 교회의 신부로서 힌두교의 성지인 바라나시에서 살아가는 오쓰까지. 각기 다른 이유로 함께 또는 따로 바라나시를 찾은 이들은 짧다면 짧은 여행 기간 동안 각자가 찾아 헤매던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다.
일본 근현대 문학을 찾아 읽는 독자가 아니라면 엔도 슈사쿠(Endo Shusaku, 1923. 3. 27. ~ 1996. 9. 29.)라는 이름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을 듯하다. 하지만 그는 대표작인 『침묵』을 비롯한 작품들로 일본 국내외의 문학상을 여러 차례나 수상한 대작가이다. 그는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어린 시절을 만주의 다롄 지방에서 보냈지만 십 대에 접어들면서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어머니와 함께 일본으로 귀국해 고국에서 학창 시절 대부분을 보냈다. 일본으로 돌아간 후 작가와 가족은 이모와 같은 집에서 살았는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이모의 영향으로 그도 어린 시절에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스스로 선택한 종교는 아니었지만 천주교는 그의 인생 전반에 걸쳐 크나큰 영향을 미쳤고 그것은 그의 작품에서도 온전히 드러난다.
엔도 슈사쿠가 남긴 작품 목록을 살펴보면 많은 작품들에 종교적 색채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는 엔도 슈사쿠의 책을 읽으며 오래전 즐겨 읽던 이승우 작가님의 글들을 떠올렸다. 글의 결이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승우 작가님의 작품들이 그러하듯 엔도 슈사쿠의 글들도 단순히 종교 소설이라고 치부하기는 힘들다. 생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우리는 과연 이 삶에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신은, 그리고 종교는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지에 대해 고민해 본 이라면 그 누구에게라도 가 닿을 수 있는 이야기들인 까닭이다.
살아생전 엔도 슈사쿠는 두 권의 책을 자신이 죽은 뒤 관에 함께 묻어달라고 요청했다 한다. 작가의 대표작인 『침묵』과 더불어 함께 묻힌 책이 『깊은 강』이었다.
* 책에서 발췌한 부분은 파란 글씨로 표기하였습니다.
* 인간이 이렇게도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나 푸릅니다: 엔도 슈샤쿠의 대표작, 『침묵』의 배경이 된 일본 나가사키에는 '침묵의 비'가 세워져 있다. 그곳에 적힌 문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