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로마 신화. 구체적인 내용까지 샅샅이 알지는 못한다 해도, 책의 제목과 이야기에 등장하는 제우스, 헤라와 같은 신들의 이름만큼은 접해본 독자들이 많을 것이라 믿는다. 그런데 그리스 신화면 그리스 신화고 로마 신화면 로마 신화지, 어째서 그리스∙로마 신화라고 한데 엮어 불리는 것일까?
시작은 그리스 신화였다. 이는 기원전 고대 그리스 시대 사람들이 만든 것으로 주로 이 세상의 탄생과 그것을 관장하는 신들, 그리고 영웅적인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다룬다. 그러던 것이 로마 제국이 그리스를 점령한 기원전 146년 이후엔 로마제국으로 전해져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로마식으로 바뀌고 이야기에 살이 붙는 등 신화에도 변화가 생기게 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리스 신화의 내용과 뼈대는 로마 신화에 그대로 계승되었으며 이는 이후 서양의 문화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유럽 문화권에서 탄생한 책을 읽거나 그림과 같은 예술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간혹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어 막막한 기분이 드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랜만의 이탈리아 여행을 앞두고 로마 제국 시대를 살았던 오비디우스(Publius Ovidius Naso, BC43 ~ AD17/18)가 쓴 『변신 이야기』를 읽기로 했다. 이탈리아를 방문한다면 박물관이며 미술관 투어가 필수일 것이기에 내가 보게 될 작품들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싶은 욕심에서 선택한 것이었다. 다만 등장인물들이 로마식 이름으로 소개되는 까닭에 그리스 신화에 익숙했던 독자의 입장에서 새로운 이름들에 적응하는 데 며칠이나 걸렸다. 가령, 유피테르는 제우스고 헤라는 유노, 아르테미스는 디아나인 식. 뿐만 아니라 등장인물 수가 많기도 많고 이름도 하나같이 복잡한 데다 심지어 같은 인물을 한 가지 이름으로만 부르는 게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언급하기도 하고 그들 간의 혈연관계까지 워낙 뒤죽박죽이라 읽는 과정이 녹록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탈리아, 아니, 유럽 여행을 앞두고 있는 이라면 이 책을 꼭 한번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다.분명, 여행의 만족도가 달라질 것이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이 이야기는 변신, 즉, metamorphosis를 다룬다.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전개, 당하는 사람(또는 신) 입장에서 억울한 사건이 대부분이기는 하다. 예를 들자면, 유피테르부터 시작해서 힘 좀 있다 하는 신들은 다 자기네들이 하고 싶은 대로 자유분방하게 살면서 인간들이 뭣 좀 해보려고 하면 그걸 벌하겠다고 사람을 새나 들짐승, 혹은 식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런 가차 없는 행동에 기가 찰 정도였지만 수 천 년 전에 쓰인 이야기에 21세기를 사는 독자의 잣대를 들이밀 수는 없지! 사실, 오늘날까지도 오래전 신화에서처럼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고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억울한 사건들이 종종 발생하는 것도 사실이니까. 일면 현실과 동떨어진 것 같아 보이는 그리스 신화가 유럽 문화의 뿌리를 이룬 것을 넘어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전 세계 수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영향을 미친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 일까?
그나저나 이 책을 읽고 나니 주변을 다른 시선으로 둘러보게 된다. 얼마 전까지 두바이의 우리 집을 들락거리던 꼬마도마뱀은 혹시 케레스 여신을 비웃었다가 도마뱀이 되어버린 건방진 사내아이일까? 베 짜는 솜씨가 인간의 수준을 넘는 까닭에 솜씨 좋은 여신들까지도 무릎 꿇게 만들었다가 노여움을 받아 거미가 되어버린 아라크네가 어쩌면 지금 저 아래, 나뭇가지에 거미줄을 치고 있는 거미일지도 몰라. 말 그대로 신화일 뿐일 테지만 이 책에 담긴 이야기를 읽고 나니 지금 내 주변에 있는 동식물과 강물, 산 같은 자연물들이 나름의 사연을 지닌 생명체로 느껴진다.어쩌면 이것은 그리스∙로마 신화 읽기가 선사하는 또 하나의 재미.
덧붙이자면, 로마 제국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의 시인이었던 오비디우스(Publius Ovidius Naso, BC43 ~ AD 17/18)는 무려 기원전에 태어난 오래전 사람이지만 글로써 영원한 삶을 살 것이라던 스스로의 말은 정말로 현실이 되었다.
“이제 내 일은 끝났다.
유피테르 대신의 분노도, 불길도, 칼도, 탐욕스러운 세월도 소멸시킬 수 없는 나의 일은 이제 끝났다.
내 육체밖에는 앗아가지 못할 운명의 날은 언제든 나를 찾아와, 언제 끝날지 모르는 내 이승의 삶을 앗아갈 것이다.
그러나 육체보다 귀한 내 영혼은 죽지 않고 별 위로 날아오를 것이며 내 이름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로마가 정복하는 땅이면 그 땅이 어느 땅이건, 백성들은 내 시를 읽을 것이다.
시인의 예감이 그르지 않다면 단언하거니와, 명성을 통하여 불사를 얻은 나는 영원히 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