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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가족 Jun 11. 2021

마흔 넘어 홀로서기를 준비한다는 것

어쨌든 자발적 프리랜서

그날은 수요일이었다. 여느 날처럼 출근해 일을 하고 있는데 남편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곳엔 거주지로서는 단 한 번도 고려해보지 않았던 도시의 이름과 내일 바로 그곳으로 가야 한다는 말이 쓰여 있었다.


남편이 근무기간 중 적어도 한 번은 서울의 본사를 벗어나 타 지역에서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아닌 밤중에 홍두깨는 아니었다. 문제는 발령일자와 새로운 곳에서의 근무 개시일자가 너무나도 가까웠다는 것이었다. 우리 집에서부터 남편의 새로운 근무지까지의 거리를 계산해 봤다. 자동차로 이동하는 시간과 대중교통을 이용해 오가는 시간을 모두 계산한 결과 서울에서 매일 출퇴근하는 것은 힘들고 발령지에서 살 집을 찾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럼 이제 나는? 나는 어떻게 하지? 안 그래도 출산휴가부터 육아휴직, 이 작은 회사에서 이런 걸 누가 쓴다고 만들었나 싶었던 해외 파견 배우자 동반 휴가까지 고루 사용해가며 회사 휴직의 역사를 썼던 내가 다시 한번 휴직의 히읗자를 꺼낸다면?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사표 하나쯤은 가슴에 품고 다닐 때도 있지만 나름 덕업 일치를 이룬 사람으로서 내가 좋아하던 분야의 일을 이젠 떠나보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두려운 건 사실이었다. 게다가 전문직도 아니고 이제 곧 마흔이라 이번에 직장을 그만두면 재취업도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울 텐데.


하지만 오래 고민할 여유는 없었다. 아쉽지만 일 대신 가족을 선택하기로 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온 가족이 한집에 모여 살며 매일의 소소한 즐거움을 함께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네 커리어를 생각해 이번엔 남편 혼자 보내는 게 어떻겠냐는 조언을 뒤로하고 그날 오후 일 년짜리 휴직원을 제출했다. 그리고 민폐를 끼친 김에 다음 날 휴가까지 신청한 후 인수인계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티를 팍팍 낼 수는 없지만 속으로는 물아래 백조의 다리처럼 동동거리며 바쁘게 하루를 보낸 나는 퇴근 후 여행이의 어린이집으로 직행해 아이를 픽업했다. 어린이집 선생님들께 간단히 사정을 설명드리고 다음번에 다시 정식으로 퇴소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곤 연간회원권을 끊어 일주일에도 몇 번씩이나 찾아가던 어린이집 근처 수족관으로 향했다. 여행이가 좋아하던 물고기들과 헤어지기 전에 인사를 나눌 기회를 줘야지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저녁 시간을 보낸 후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저녁 늦은 시간까지 회사 근처를 떠나지 못하던 남편을 태우고 집으로 향했다. 그리곤 여행용 트렁크에 며칠 동안 쓸 짐을 대충 쓸어 담고 바로 남편의 새로운 근무지를 향해 운전대를 잡았다. 목적지에 도착하고 보니 새벽 한 시가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


하늘이 도우사 남편의 새로운 근무지 근처에 나의 친정이 있었다. 나이 마흔이 다 되어가지고도 아직도 급할 때면 엄마, 아빠 생각이 가장 먼저 나는 철없는 딸년은 친정 부모님께 여행이를 맡기고 다음날 새벽, 남편과 함께 그의 새로운 근무지가 될 곳으로 떠났다. 남편이 새 사무실에 출근해 있는 동안 나는 전날 급하게 연락을 취해 놓은 부동산 사장님을 만나 남편 회사 근처 아파트들을 순례하기 시작했다. 깊은 고민을 하지 않은 덕분인지 오래지 않아 적당한 곳을 찾았고 바로 계약금을 보냈다.


부동산 일을 끝내고 나니 점심시간이었다. 그리고 이젠 여행이가 다닐 어린이집을 찾을 차례였다. 낯선 도시에서의 첫 끼니인데 허투루 먹고 싶지는 않아서 맛있다는 레스토랑을 검색해 찾아갔다. 통창으로 탁 트인 풍경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혼자 자리를 잡고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요리를 앞에 둔 나는 인터넷에 접속해 그 도시의 보육기관 목록을 쫙 뽑았다. 그리고는 우리의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가까운 순서대로 무작정 전화해 자리가 있는지 문의했는데 다행히 새 집에서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평판까지 좋은 어린이집이 있었고 그곳에 마침 남은 자리가 있다 했다. 죄송하지만 오늘 시설을 좀 살펴봐도 되겠냐는 요청에 원장 선생님께서 흔쾌히 그러라고 하셨고 그렇게 여행이의 입학 신청서까지 내고는 마음 편히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 난리를 치른 것이 2020년 초의 일이다. 그런데 1년 후 서울로 다시 돌아갈 줄 알았던 우리 가족은 계획이 변경되어 이제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 와있다. 같은 나라 다른 도시로 이사하면서도 처리할 일이 많았지만 국제이사에 비하니 2020년 초의 일은 그저 귀여운 해프닝쯤으로 여겨질 정도다. 그래도 다행히 우리 가족은 두바이에서 마음에 쏙 드는 집을 구해 바닷가 라이프를 즐기고 있고 국제학교에서 정규 교육과정을 시작하게 된 여행이도 조기교육이 반대했던 부모 때문에 회화는커녕 알파벳도 제대로 못 쓰는 상태에서 갑작스레 영어로만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고맙게도 새 환경에 잘 적응해 즐겁게 학교에 다니고 있다.


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두바이에서 영원히 살 것은 아니므로 얼굴에 철판을 깔고 다시 한번 회사에 휴직 연장 신청서를 제출했다. 규정 상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기에 3년 연장을 요청했지만 그런 나에게 회사는 1년까지는 추가로 연장해 주겠으나 더 이상은 무리라는 답변을 주었다. 그러면서 내년에 나 혼자만이라도 귀국해서 복직할 수는 없냐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처음 그 답변을 받았을 때는 이 회사에서 했던 수많은 일들이 뇌리를 스쳐가며 그동안 그곳에서 고생스럽게 한 일들도 얼마나 많았는데 회사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라는 생각이 들고 휴직 연장에 반대한 사람들이 도대체 누군지 알아내어 그 사람들을 실컷 미워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곤 며칠을 엉엉 울기도 했다. 나라는 사람의 가치가 그렇게밖에 평가받지 못한 것인가 싶어 부끄러운 마음에 남편 앞에서조차 마음껏 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생기니 회사가 조건 없는 사랑을 베푸는 자선 단체도 아니고 나처럼 휴직 카드를 자주 꺼내는 직원보다는 묵묵히 그 자리를 계속해서 지키고 있는 직원을 더 선호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휴직이 끝나는 날짜를 나의 퇴직 날짜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디데이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오늘 당장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고 이곳 두바이에서 한국에서는 하기 힘든 여러 가지 경험을 하며 살고 있으니 배부른 소리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마흔 넘어 다시 한번 일하는 사람으로서 홀로서기를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스럽고 무서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믿고 싶다. 이 시기가, 여차하면 100살까지 살아야 하는 내가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제2의 인생을 준비할 최적의 기회가 되어줄 것이라고.


휴직 중이지만 나만을 위한 일은 그 어떤 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마음이 너무 허전할 것 같아 작년에도 글과 사진을 기고하는 일을 정기적으로 했었다. 그리고 얼마 전 두바이에 온 이후 처음으로 한국의 모 잡지에 게재할 글을 처음으로 써 보냈다. 짧은 분량이었지만 정성 들여 취재를 하고 글을 쓰고 사진을 찍었다. 그 대가로 받을 원고료가 내 통장에 입금되면 그것은 쓰지 않고 그대로 남겨둘 생각이다. 그리고 그 금액을 가끔 들여다보며 앞으로 프리랜서로서의 나의 삶을 꾸준히 준비할 것이다. 마흔 넘어 새롭게 시작하는 나의 새로운 커리어에 응원을 보낸다.


우리집에서 만나는 하루의 맨 처음 ⓒ여행하는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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