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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비아 Feb 20. 2024

내 이름은 ㅇㅇㅇ 와이프야

두 번째 편지

엄마 밍글라바!


어제는 회사 가족분들과 함께 저녁을 먹었어.

내가 회사를 다닐 때도 동료 가족과 식사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여기서는 가족끼리 만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아. 남편을 중심으로 가족과 가족의 만남이다 보니 여기서 난 ㅇㅇ의 와이프로 불리고 있어. 아기를 낳고 2년간 ㅇㅇ엄마로 불리는 것에 겨우 익숙해졌는데 이번엔 ㅇㅇㅇ와이프라니. 내 이름을 다시 찾기까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네.

그럼 또 소식 전할게!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가, 교실 뒤 게시판에 붙어있던 종이에 쓰인 내 꿈은 대통령이었다. 꿈은 클수록 좋다는 선생님 말씀을 듣고 당시 생각했던 직업 중 가장 높은(?) 직업을 쓴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 당시 우연히 봤던 힐러리 클린턴의 인터뷰를 보고 꿈에 대한 마음을 쉬이 접었다. 그녀의 꿈은 대통령이었지만 여성이 대통령이 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고, 대통령이 될 수 없다면 영부인이라도 되겠다는 목표를 가졌단다. 그래서 그녀는 그의 남편인 빌 클린턴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성심성의껏 내조를 했고 결국 대통령 대신 대통령 부인인 영부인이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힐러리가 대통령을 꿈꾸던 그

 시절, 그 누구도 여자 대통령은 말도 안 된다 생각했지만 그 후로 몇 십 년이 지나 21세기가 코 앞인 내가 꿈꿨던 때도 여전히 여자 대통령은 아무도 상상을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나의 야망은 대통령보다는 좀 더 현실적(?)이자 세계를 누릴 수 있는 외교관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야망은 야망일 뿐, 내 성적과 머리는 내가 외교관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비록 외교관은 되지 못했으나 다양한 나라에 대한 호기심을 풀어보고자 관광 관련 진로를 택했고, 호텔경영학과를 졸업 후 자연스럽게 호텔업계에 입성하게 되었다.


호텔에 입사 후 여러 부서를 거쳤지만 남편과는 세일즈팀에 있을 때 함께 근무를 했다. 직무가 같다 보니 같이 일할 때가 많았고 자연스레 대화를 많이 나누게 됐다. 사적인 이야기를 하며 가장 쿵짝이 잘 맞았을 때는 여행 이야기를 할 때였다. 남편 역시 나만큼이나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남편과 사이가 좀 더 가까워졌을 시기에 난 퇴사 후 독일로 워킹홀리데이를 준비 중이었지만 남편 또한 어학연수로 외국살이를 해 본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날 말리기보다는 진심으로 응원해 줬다. 그렇게 우리는 연인이 되자마자 장거리 연애를 하게 됐고 애틋한 시기를 거쳐 결국 결혼까지 하게 됐다. 독일에서의 경험이 부족했던 건지 결혼 후에도 늘 해외에서 사는 삶을 꿈꿨지만 짧은 여행이 아니고서는 외국에 정착할 명분이 없었다. 1인 사업을 했던 나에겐 특히나 더 구실이 없었고 남편 회사의 해외 주재원은 몇 군데 없는 데다 파견 인원도 워낙 극소수라 파견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그 기회마저 포기하기엔 너무나도 아쉬웠다. 옆에서 계속해서 할 수 있다는 도전 정신을 심어줬고, 나의 적극적인 가스라이팅 덕에 마침내 남편의 주재원 파견이 결정되었다. 그곳이 비록 내가 원했던 꿈의 나라가 아닌 개발도상국이었지만 말이다. 내 스스로 주재원이 될 수는 없었지만 주재원의 와이프가 되었으니 힐러리 클린턴의 스토리가 나에겐 꽤 의미가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막상 내 일을 다 포기한 채 ‘주재원 와이프’라는 타이틀을 달고 남편을 따라와 보니 내게 꼭 맞는 타이틀은 아니었다. 내가 어떤 사람으로서 미얀마에 가는지는 비행기를 탄 순간부터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입국신고서에 직업을 쓰는 칸을 두고 뭐라고 써야 할지 고민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고민만 한참을 하다가 결국엔 빈칸으로 남겨두었다. 수없이 비행기를 타보며 단 한 번도 빈칸으로 둔 적이 없었고 하다 못해 퇴사 후 독일에 갈 때도 학생 신분으로서 갔으니 직업란에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는 그 자체에 기분이 묘했다. 그게 뭐 그리 중요한 거라고 사람 마음을 들쑤시는지.


아이를 출산하고 나서 ㅇㅇ엄마로 불리기 시작할 때는 또 하나의 ‘본캐’가 생겼다 생각을 했지만 이제는 정말 빼도 박도 못하게 누구의 와이프 또는 누구의 엄마만이 나를 지칭할 수 있는 단어였다. 나를 감싸고 있던 모든 사회적 허물이 벗겨지고 나라는 인간 자체 알맹이만 남겨져 벌거벗겨진 기분이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주재원 사람들과 오며 가며 인사할 때도 나는 ㅇㅇㅇ의 와이프이지, 내 이름으로 소개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처음엔 나라는 존재가 녹아져 내린 것 같아 우울감이 느껴졌지만 언젠가부터 구태의연하게 나에 대해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나도 다른 이들을 남편이 알려준 대로 ㅇㅇㅇ부장님의 와이프, ㅇㅇㅇ팀장님의 와이프로 기억했고 거기서부터 관계가 맺어졌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거나 누굴 소개받는 자리에서도 내 이름보다는 ㅇㅇㅇ의 와이프로 나를 먼저 지칭하는 것이 익숙해진 걸 보면 이제야 주재원 와이프로서 자격이 좀 된 듯하다. 늘 내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이 단지 ㅇㅇ의 가족 구성원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나도, 주변 친구들도 모두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모든 와이프들은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가족에게 많은 사랑을 쏟고 더욱더 진심으로 자기 계발에 힘쓰며 살고 있다. 그리고 나도 그들 중 한 명이 되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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