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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비아 Dec 09. 2017

퇴사일기 #76. 퇴사, 여행, 그리고 일년 후.

퇴사 후 1년 7개월간


대기업을 퇴사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용감했고,
퇴직금을 털어 장기간 세계여행을 떠나겠다는 시도 또한 주변인들이 모두 놀랄 만큼 흔한 일이 아니긴 했다.

대기업이라는 질 좋은 울타리로부터의 탈출.
어떠한 계획도 기약도 없는 오롯이 나만을 위한

여행 그리고 그 일년 후.
나는 과연 행복해하고 있을까.


작년 4월, 여행의 두번째 목적지였던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1. 작년 4월 독일로 떠났고 유럽 각국을 방랑하다가 7개월 후인 작년 11월 한국을 돌아왔다. 첫 5개월간은 미래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고 그 날 하루하루 보고 듣고 먹은 새로운 경험에 대해 행복함을 느꼈다. 이후 2달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하며 여행을 했고 내가 즐거워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냈다.



2. 한국에 돌아와 남은 퇴직금으로 6개월간 그 즐거워 할 수 있는 일을 배웠다. 백수의 신분이었지만 취준생 시절처럼 초조하지도 조급하지도 않았고 사람들의 시선에 대한 압박감도 없었다. 내가 매일매일 즐기면서 하는 일이 직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마냥 좋았다.



3. 올해 5월, 사업자등록을 하고 1인 기업가가 됐다. 더 이상 투자할 비용도 생활비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로 조금이나마 돈을 벌 수 있는 게 보람차고 즐거웠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남의 회사를 위해서가 아닌, 나를 위해 내 회사를 위해 내가 좋아하는 일을 위해서가 아닌가!



4. 행복을 꾸준히 영위하기 위해서는 결국 돈이 중요했다. 큰 투자비용도 없이 시작한 작디 작은 영세사업은 2평 남짓한 1인 사무실 월세를 내기에도 빠듯했고, 겉만 번지르르한 대표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 나는 한 회사의 성실한 대리에게 매번 밥을 얻어먹게만 됐다. 난 단지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하며 소소하게 살고 싶었을 뿐인데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5. 퇴사를 한지 1년 7개월.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채용 사이트에 오픈해놨던 이력서 덕에 3-4개월간 수없이 받았던 헤드헌팅도 그 수가 급격하게 줄었다. 생활고가 다가오니 습관처럼 채용 사이트를 매일 뒤적뒤적 거리는 나를 발견했다. 올해 과장 승진을 한 회사 동기의 월급은 얼마나 올랐을까를 생각해보고 대기업 과장과 1인 기업 대표의 사회적 명예에 대해 비교해 보게 됐다. 딸이 대기업에 다닌다고 늘 자랑하셨지만 퇴사한다고 했을 때 막상 아무 말도 않으시고 내 결정을 묵묵히 지지하셨던 엄마의 얼굴이 괜시리 떠올려졌다. 내가 과장을 달았더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6. '잘 돼가? 부럽다. 나도 내가 하고 싶은 일 하고 싶어.' 전 직장 동료들을 오랜만에 보면 듣게 되는 고정적 첫 멘트다. 빈말을 못하는 성격 상 이 첫 멘트부터 매번 말문이 막힌다. 잘 돼가냐는 질문에 대답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경제적으로 힘들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건 맞기에. 돈과 즐거움의 괴리에서 방황을 하고 있는 요즘.



7. "딱 6개월만 더 후회없이 해보고 안되면 경력이 단절되기 전에 다시 돌아가려구요." 회사 생활의 멘토이자 인생 선배에게 굳세게 얘기했다. 퇴사할 때도 '그래, 넌 젊어. 뭐든지 할 수 있는 나이잖아! 내가 너 나이라면 뭐든 했을거다.' 라며 용기를 불어넣어 줬던 선배는 '그래, 아직도 젊어. 너에겐 밝은 미래가 있어. 안되면 그때 돌아오면 되지.' 라며 현실인듯 현실 아닌 현실 같은 답변을 해줬다.



8.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모두 접고 6년간 했던 일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서 괜히 퇴사했구나 후회하는 건 아니라고 스스로를 다독여본다. 어쨌든 내가 했던 일은 대학 전공과도 맞는 일이고 그 일이 죽을만큼 싫어서 떠나온 것도 아니며 퇴사를 했다고 해서 꼭 직업을 바꿔야 할 필요도 없을 뿐더러 돈을 벌어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단지 기계 같았던 내 모습에, 바싹 말라있던 내 청춘에 잠시 '쉼'을, '경험'을, '자극'을 주고 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시간이

서른 즈음에 한 번은 필요했으니까.



9. '여행하고 오길 정말 잘한 것 같아. 여행 전과 후의 에너지가 확연히 달라!' 라고 주변 친구들이 몇 번이고 나에게 하는 말.
부정적이었던 나는 긍정적으로 변했고,
물욕이 많았던 나는 욕심을 버리게 됐고,
모가 나있던  나는 둥글둥글 너그러워졌고,
항상 초조하고 조급했던 나는 여유로워졌고,
나약했던 나는 강인해졌다.
그러므로 나는 좀 더 버텨보기로 했다. 즐거움은 덜 한, 하지만 안정적인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더라도 후회 없이 내 즐거움을 성취하고 가기로 다짐했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행복하기 때문이다.

돌아오기 전 마지막으로 여행은 한 나라는 아이슬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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