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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비 매거진 Dec 02. 2021

차와 이야기의 집, 울산 다담한옥

산새 소리에 아침을 열고 장작을 태우며 밤을 닫는다.
한 잔의 차에 따뜻한 문장들이 오가는 곳,
다담한옥에서의 하루다.


간월루의 누마루 위 찻상. 다담한옥의 대표 포토존 중 하나다


차 마시러 오세요


찻잎이 우러난다. 옅은 김이 핀다. 몇 잔째더라? 첫 잔을 들었을 땐 산이 보였고 두 번째 잔을 넘겼을 땐 새소리가 들렸는데. 이번 잔을 내려놓으니 장작 타는 꼬수운 냄새가 난다. 산과 새와 장작 그리고 차 한 잔. 울산 다담한옥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도화지 귀퉁이 어딘가엔 꼭 들어가야 할 요소들. 여기에 고즈넉한 한옥까지 배경으로 칠해진다면 더 보탤 것이 없겠다. 


간월루에서 바라본 다래정과 감나무


밑그림을 그려 보려고 다래정의 차실을 나왔다. 고무신을 신고 설레설레 마당을 돌았다. 다담한옥의 객실은 딱 3채. 전부 독채 한옥이고, 2:2 복식 배드민턴을 쳐도 충분할 정도로 널찍한 ‘1객실 1마당’을 품고 있다. 우람한 솟을대문이 있는 언덕 아래엔 삼휴당과 호스트가 머무는 관리실이, 언덕 위쪽엔 다래정과 간월루가 있다.


간월루의 외관


3개의 객실은 크기도 매력도 제각각이지만 큼직한 공통점이 있다. 어디서 머물든 꼭 한 번은 차를 마실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 ‘다담(茶谭, 차와 이야기가 있는 곳)’에 담긴 뜻처럼 모든 객실에 차를 위한 공간이 있다.


다래정의 차실에선 향긋한 차향이 난다


삼휴당에선 정성 들여 가꿔진 소나무 정원을 바라보며 차를 마실 수 있고, 간월루엔 아담한 찻상과 방석이 놓인 누마루(다락처럼 한 층 높게 만든 마루)와 창문 두 개가 난 차실이 있다. 다래정은 이름부터 그렇다. ‘차 마시러 오라(茶來)’는 속삭임에 이끌려 차실로 들어가면 시원한 통유리 창에 산맥이 넘치게 담긴다. 예쁜 다기 세트에 찻잎을 우려 내 창문을 액자 삼아 한 잔. 술도 아닌데 풍경에 취한다. 



아기 새들의 아늑한 둥지


호로록. 저녁이 오기 전, 또 한 모금. 찻잎의 향긋함이 마음을 적신다. 별안간 아기 새가 된 기분이다. 어미 새가 부지런히 나뭇가지를 물어 와 지은 포근한 둥지. 그 안에 누워 노곤한 몸을 맡기는 아기 새. 한 가지 추측을 해 봤다. 어쩌면 산 때문이 아닐까 하고. 

KTX 울산역에서 택시를 타고 오는 20여 분 동안은 시작에 불과했다. 여기도 저기도 온통 산, 산, 또 산이다. 밝얼산, 오두산, 간월산, 신불산(영남알프스 둘레길도 숙소에서 도보로 갈 수 있다)…. 그 한가운데에 ‘거리마을’이 있고, 마을 입구에서도 더 깊숙이 들어가야 비로소 다담한옥이란 둥지가 나온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묘하게 보호받는 기분인데, 그렇다고 아주 외딴 곳은 아니다. 식당과 마트, 카페, 등억 온천단지를 비롯한 관광지들이 차로 10분 거리다. 고요하나, 외롭지 않다.


널찍널찍한 마당은 다담한옥의 자랑거리다
솟을대문 너머로 펼쳐지는 삼휴당과 관리실의 풍경


투숙객들의 둥지는 실제로 주인장이 17년간 거주한 그의 둥지이기도 하다. 언덕 아래 관리실은 주인장의 아버지가 3년에 걸쳐 손수 지은 한옥이라고. 작년 여름, 창고로 쓰던 한옥 한 채를 밤낮으로 쓸고 닦아 세상에 내놓은 게 지금의 삼휴당이 됐다. 2021년 2월부터는 다래정과 간월루까지 확장해 운영하기 시작했다. 일부러 리모델링은 거치지 않았다. 세련된 현대식 한옥이 아닌, 옛날 전통 한옥의 모습 그대로다. 투박하지만, 아니 투박해서 따뜻하다. 우리네 집처럼.


리모델링을 거치지 않아 옛 한옥의 모습을 그대로 갖춘 간월루


둥지를 더욱 둥지답게 만드는 데엔 주인장의 손때와 인심도 한몫한다. 숙소엔 그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수북이 쌓여 있는 장작부터 가지런히 빗질된 길목, 아기자기한 정원까지 무엇 하나 그냥 만들어진 게 없다. 


주인장의 손때가 묻은 소나무 정원과 텃밭이 삼휴당을 감싼다


텃밭만 해도 무려 14종류다. 다래, 오디, 감, 대추, 사과, 블루베리 등 갖가지 먹거리들은 그의 손을 거쳐 ‘아기 새’들에게까지 전달되곤 한다(염치없이 한가득 얻어 먹은 감에서는 세상 달콤한 맛이 났다). 4월부터 8월까지는 투숙객들이 직접 식재료를 재배해 보는 텃밭체험도 가능하다. 

주인장의 넉넉한 인심 때문일까. 유독 다담한옥엔 재방문 고객들이 많다. 연간 숙박비를 일시불로 결제하고 달마다 꼬박꼬박 방문하는 이들도 있다고. 영업사원 역할을 톡톡히 하는 귀여운 길고양이들이 수시로 다담한옥을 들락거리는 이유도 덩달아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다.


간월루와 다래정으로 올라가는 언덕길


차 생각이 나는 밤


아궁이에서 장작 타는 냄새가 나면 다담한옥에 저녁이 왔다는 뜻이다. 수천 번의 입김과 부채질 끝에 태어난 불씨는 밤새 부지런히 향토 구들을 데우고 군고구마와 ‘불멍’을 선사한다. 저녁이 왔음을 알리는 다른 신호는 마당에서 나는 바비큐 냄새다. 미리 예약만 하면 바비큐 시설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아궁이 불씨 속에서 군고구마 향기가 퍼진다


지글지글 끓는 바닥과 찌개, 둘 중 어느 것에 몸을 던질까 고민하다 결국 ‘선찌개 후바닥’ 순이 됐다. 통통해진 배를 쓰다듬으며 뜨끈한 바닥에 누우니 또다시 차 생각이 난다. 차가 생각난다는 건 마음이 바쁘지 않다는 뜻이다. 찻잎이 우러나기까지의 시간, 찻잔을 채우고 비워 내는 시간, 천천히 맛을 음미하는 시간은 모두 여유를 필요로 한다. 그러니까, 결국 좋은 공간이란 차가 생각나는 공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담한옥은 좋은 공간이었다. 이런 숙소에 머물 때면 내가 숙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숙소가 내 안에 머문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면 나는 기꺼이 마음 한 칸을 떼어다 그에게 내어 주는 것이다. 오래오래 머물러 있을 수 있도록. 


장독대에선 무엇이 익어 가고 있을까
불어오는 바람에 한옥의 고즈넉함이 더해진다


밤 열두시, 고양이와 마주 앉아 데워진 마음으로 차를 따른다. 하루의 시작과 끝을 차로 열고 차로 닫은 셈이다. 이름 모를 찻잎에선 깊은 밤보다 더 깊은 맛이 난다. 내일 아침이면 더 옅어져 있겠지. 추억도 별 다를 바 없겠지만, 오늘은 진한 채로 두기로 했다. 따뜻한 문장이 한 잔의 차에 담겨 오간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다담한옥을 즐기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이슬아 주인장의 말이 생각나는 밤이다. 


간월루 차실의 창밖 풍경



울산 다담한옥
주소: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거리지곡2길 8
전화: 010 6481 1491 
요금: 겨울 성수기 기준, 삼휴당 18만원부터, 간월루 33만원부터



글·사진 곽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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