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재시작
코로나 때문에 난리다. 모든 여행이 멈췄다. 지난 2월21일 일본 미야자키를 다녀온 이후 아직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던 기내식이 이젠 그립기까지 하다. 스튜어디스가 “비프 오어 치킨(Beef or Chicken)?” 하고 물을 때면 맥주만 달라고 한 적이 많았지만, 지금은 “비프 앤 치킨 올, 플리즈”라고 대답하고 싶다. 지금 여행이 무척 고프다.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전, 나와 박찬일, 레이먼 킴 셰프는 어울려 자주 놀러 다녔다. 일본이며 홍콩 등지를 다니며 많이 먹었다. 우리에게 여행은 곧 그곳의 음식을 먹는 일이었다. 먹는 것이 쉬는 것이었고 먹는 일이 또 공부였다. 오사카에서는 라멘을 섭렵했고 미야기현에서는 ‘상어 심장회’를 먹기도 했다. 홍콩에서는 ‘다이파이동(大排?, 노천식당)’을 건너다니며 온갖 음식을 탐닉했다. 그 시간이 그립다.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돌아다니던 시절에서 우리는 고작 석 달을 떠나 있었다. 그 석 달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길고 지루할 줄이야. 그래서 우리는 다니기로 했다. 마스크를 쓰고, 손을 자주 씻고, 틈이 날 때마다 손 소독제를 바르며 우리는 식당 문을 열었다. 여수에서 백반과 삼치회를 먹었고 마산에서는 오래된 중국집에서 볶음밥을 먹었다. 통술 집에서 기분 좋게 취하기도 했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먹는 여행 이야기, 대전으로 향했다.
대전이니까
두부두루치기 부터
“뭐부터 먹을까요?” 레이먼 킴 셰프가 말했다. “대전이니까, 두부두루치기부터 먹자!” 박찬일 셰프가 대답했다. 대전이니까 두부두루치기부터.
대전 사람들은 두루치기를 즐겨 먹는다. 그런데 이 두루치기가 좀 별나다. 대부분 두루치기 하면 돼지고기를 떠올리겠지만, 대전식 두루치기에는 돼지고기가 들어가지 않는다. 대신 두부가 잔뜩 들어간다. 고춧가루를 듬뿍 넣어 목이 따가울 정도로 맵다. 여기에 면 사리를 넣어 비벼 먹는다. 밥으로도 좋고 소주, 막걸리 안주로도 좋다.
대전역 근처에 ‘별난집’이라는 두부두루치기집이 있다. 평안남도 진남포가 고향인 장순애씨가 1978년 이곳에 자리를 잡고 문을 열었고 지금껏 한 번도 옮기지 않았다. 지금은 막내 아들이 운영한다. 의자와 식탁도 그대로다. 나무문을 밀고 들어서니 고소한 들기름 냄새가 가득 고여 있었다. 벽과 탁자, 천장에는 기름때가 오랜 세월을 말해 주듯 새까맣게 묻어 있었다.
중년의 남녀 손님이 두부두루치기를 먹고 있었고 주인은 구석 테이블에서 쫄면을 다듬고 있었다. 이 집은 두루치기에 칼국수가 아닌 쫄면을 넣어 준다. 대전 사람들은 왜 이렇게 칼국수(쫄면)를 즐겨 먹을까.
대전 시내는 온통 칼국수집이다. 예전에 대전으로 이사 간 후배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대전 사람들은 칼국수에 미친 거 같아요.” 최근 <주간경향>을 보면 대전에 있는 칼국숫집은 570곳이 넘고 칼국수를 팔고 있는 음식점을 다 합하면 1,500곳은 족히 넘는다. “한국전쟁 이후 실향민이 대전에 많이 자리 잡았고 미국의 구호물자로 밀가루가 많이 풀렸지. 그러면서 칼국수가 서민 음식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어. 당시 대전이 철도교통의 중심지였는데, 대전에서 밀가루가 모여 전국으로 퍼져나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전에 칼국숫집이 많아진 게 아닐까 싶어.”
두부두루치기에 들어간 쫄면 사리를 건지며 박찬일 셰프가 말했다. “와, 두부두루치기라니. 두부로 어떻게 이런 음식을 만들어 먹을 생각을 했을까요. 아니 어떻게 이런 음식을 만들어 볼 생각을 나는 못했지?”
레이먼 킴 셰프는 커다란 두부 한 점을 숟가락에 담으며 이렇게 말했다. “칼칼한 고춧가루의 맛과 두부의 부드러움이 잘 어우러진 것 같아요. 두부 속에 양념이 잘 배인 것 같아요. 은근히 올라오는 부추 향도 좋고요.”
이 집은 두부두루치기에 북어와 양파를 삶은 육수를 사용한다. 난 막걸리가 제일 맛있었다. 원막걸리는 대전에서만 먹을 수 있다. 알싸하면서도 부드럽다. 두부두루치기와 환상의 궁합이다. 게다가 이 집에서는 양은주전자에 담아 준다. 함께 주문할 수 있는 녹두지짐은 고소하다. 돼지고기와 녹두로 반죽했는데 들기름을 잔뜩 뿌리고 굽는다. 겉바속촉,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다. 막걸리가 자꾸 넘어간다.
이 집에는 비장의 메뉴가 있다. 차림표에는 없는 두부구이다. 단골들만 안다. 들기름에 두부를 바싹하게 구워 준다. 두부가 정말 맛있다. “개업 때부터 저희 집에 두부를 대주는 집이 있어요. 요즘도 그 집에서 받아 씁니다. 두부집 아주머니도 많이 늙으셔서 하루에 2판 정도밖에 못 만들어요.” 맛은 여전하다.
별난집
주소: 대전광역시 동구 중앙로193번길 8
영업시간: 매일 12:00~21:00
전화: 042 252 7761
가격: 두부두루치기 1만3,000원, 녹두지짐 1만2,000원
차곡차곡
음식 테트리스
별난집을 나와 중앙시장을 걸었다. 중앙시장은 한국전쟁 때 피난민들이 노점상을 열면서 만들어졌다. 순대골목을 걷다가 백천순대라는 순대집에 들어갔다. 문을 연 지 50년이 넘었다고 한다. 모둠 순대를 시켜 놓고 또 막걸리를 마셨는데 순대 속에는 특이하게도 기름이 많았다. 오소리감투와 염통은 잡내가 없고 잘 삶아져 있었다.
순대를 먹고 나오다가 냉면과 짜장면을 먹었다. 술을 마시면 탄수화물이, 특히 면이 당긴다. 시장에 ‘원미냉면’이라는 가게가 있다. 냉면과 짜장면을 같이 판다. 냉면이 고작 6,000원이다. 우리는 냉면 한 그릇과 짜장면 한 그릇을 시켜 놓고 맥주와 소주를 마셨다. 냉면은 달았고 고춧가루를 듬뿍 친 짜장면은 양이 엄청 많았다.
더 이상 음식이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배가 불렀지만 희한하게도 젓가락질이 멈추지 않았다. 가느다란 면은 두부와 빈대떡, 순대로 가득한 위의 빈틈을 미꾸라지처럼 파고들었다. 위장에 음식으로 테트리스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천순대
주소: 대전광역시 동구 중동 대전로791번길 48-1
영업시간: 매일 09:00~19:00(매월 둘째 주 일요일 휴무)
전화: 041 226 0140
가격: 순대국밥 5,000원, 순대(大) 1만5,000원
인생 두부
‘숨두부’라는 음식이 있다. 순두부가 아닌 숨두부. 순두부보다 거칠다. 콩 단백질이 엉긴 상태가 살아 있다. 짭쪼롬한 간수에 담긴 숨두부를 숟가락으로 떠먹는다. ‘평양숨두부’는 대전에서 가장 오래된 숨두부 전문점이다. 6·25 전쟁 당시 평양에서 피난을 내려와 문을 열어 지금은 3대를 이어오고 있다.
숨두부라는 이름이 독특하다. 북한에선 간수로 두부 굳히는 것을 ‘숨을 잡는다’라고 말한다. 굳히기 전 간수 상태에서 꼴록꼴록 소리를 내는데 이것이 마치 숨을 쉬는 것 같다고 해 숨두부라는 이름이 붙었다.
간수는 짜고 달짝지근했다. 그 속에 담긴 두부는 고소하고 그윽했다. 지금까지 마신 술이 모두 깨는 느낌이었다. 네모반듯한 공장식 두부와는 확연히 달랐다. 우리는 지금까지 먹었던 두부 중에서 제일 맛있다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지금까지 일본 사가현 가라쓰의 ‘가와시마 두부점’에서 먹은 두부를 가장 맛있는 두부로 기억하고 있지만 대전의 숨두부는 그에 뒤지지 않는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숨두부의 맛이 입술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
평양 숨두부집
주소: 대전광역시 동구 대전로 381
영업시간: 매일 10:00~22:00
전화: 042 284 4141
가격: 숨두부 5,000원
마무리는 칼국수지
숨두부집을 나와 ‘어능정이 거리’에서 치킨집을 두 군데나 돌았다. 다음날 일어나 거울을 보니 얼굴이 퉁퉁 부었다. 마지막이라는 핑계로 칼국수 한 그릇을 먹고 서울로 향하기로 했다. 대전에 왔으니 칼국수를 먹어야지. 안 먹으면 섭섭하다.
‘신도칼국수’로 향했다. 칼국수는 두부두루치기와 함께 대전을 대표하는 음식이다. 박찬일 셰프의 책 <노포의 장사법>에서 대전의 칼국수를 이렇게 썼다.
‘칼국수처럼 단 한 그릇의 음식에 우리 현대사가 녹아 있는 경우도 드물 것 같다.’ 신도칼국수 주인장의 말도 이렇게 옮겨 적었다. ‘냉면집을 하시는데, 아무래도 값이 좀 나갔대요. 당시 역 앞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짐꾼과 마차꾼 같은 이들이 배불리 먹을 건 뭐가 있을까 하시다가 칼국수로 업종을 바꾸신 겁니다. 기차 승객도 엄청나게 많았고, 하여튼 손님은 많았다고 해요. 그러니 그들이 배불리 먹을 음식을 하는 게 중요했던 것이지요.’
신도칼국수 벽에는 개업 때부터 사용하던 칼국수 그릇들이 벽을 장식하고 있다. 칼국수 한 그릇에 30원 하던 시절의 노란 양푼은 지금의 칼국수 그릇보다 두 배나 크다. 우리는 칼국수와 수육을 시켰다. 아, 물론 원막걸리도 빼놓지 않았다.
시원한 칼국수 국물을 다 들이켜고 나서야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에 탑승했다. 문득 슬로베니아라는 나라가 떠올랐다. 유럽 동남부에 자리한 나라인데 우리에게는 좀 낯설다. 대략 전라도 넓이의 면적에 200만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1991년 유고슬라비아 공화국이 해체되면서 독립했는데 이 나라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 모르는 사람이 아는 사람보다 더 많을 것이다.
파울루 코엘류의 소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에서 주인공 베로니카는 자살을 결심하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조국 슬로베니아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글을 쓴 기자에게 슬로베니아를 설명하는 편지를 쓰기로 마음먹는다. 그녀는 탄식한다. ‘슬로베니아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몰라. 아무도. 이는 온당치 못한 국제적 무관심이다.’
슬로베니아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아, 이런 곳이 있구나. 와인이며 치즈며…, 아무도 모르지만 자기들끼리 오손도손 모여 맛있는 거 먹으면서 잘 사는 그런 곳이 있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대전도 그랬다. 두부두루치기며 녹두전이며 칼국수, 치킨, 순대, 숨두부며…. 아무도 신경 쓰지 않지만 자기들끼리 맛있게 먹으며 잘 살고 있었구나. 차창 밖으로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시간은 가고 있었고 우리는 대전에서 맛보지 못한 음식이 너무 많아 아쉬울 뿐이었다.
신도칼국수
주소: 대전광역시 동구 대전로825번길 11
영업시간: 매일 09:00~20:30
전화: 042 253 6799
가격: 칼국수 4,500원, 수육 1만2,000원~1만5,000원
글·사진 최갑수 에디터 강화송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