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생각을 나눕니다]
이 책은 혼란스럽습니다. 작가는 등장인물의 시점과 시간을 수시로 바꾸어가며 이야기하는데.. 각 인물들은 무엇인가로부터 도망치고, 또 다른 무언가를 갈구하는 불안정한 상태라 몰입되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작가는 이들이 허구 속 인물이라는 것을 굳이 강조합니다.
'토마시'는 '가족'을 거부하지만 어느 순간 '테레자'에게 집착(동정)을 하고, '테레자'는 엄마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며 '토마시(를 통한 신분 상승)'을 사랑합니다. '사비나'는 아버지에 대한 그림자에서 벗어나질 못하며, 왜인지도 모를 '맹목적 배반'을 추구하며 살아가죠. 그들은 무언가 명확한 목적도 모른 채 꼬리잡기를 하듯 돌고 돕니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대(1968년 전후)부터가 혼란스러운 시기입니다. 우리로 따지면 1980년 대로, '프라하의 봄'과 '서울의 봄'이라는 면에서도 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이러한 거대한 역사의 파도에 대한 피와 땀의 투쟁이 아닙니다. 단지 살아남은, 살아가는 사람들의 존재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오랜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 브레히트]
어떤 이는 혁명(?)의 시대를 동경하고, 어떤 이는 조소하며, 또 어떤 이는 자신의 미약한 존재감을 확인받고 싶어 합니다. 사실 시대 자체는 중요하지 않을지 모르죠.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좋아’*할 수도 있는 법이니까요.. 다만 시대의 엄중함과 무거움 탓에 나의 존재감이 더욱 부유(浮游)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체코에서 태어나, 프랑스에 정착'한 밀란 쿤데라처럼..
이 책을 읽다 보면, 소유와 존재에 대해 이야기한 에리히 프롬이 함께 떠오릅니다. 아마도 존재(To Be)에 대한 불충족이 소유(To Have)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지는 듯 싶더군요. 여기서의 소유욕은 사랑 또는 섹스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각자 사회에서 느끼는 결핍을 애정의 소유를 통해 확인 받고자 하는 게 아닐까요?
테레자는 발가벗은 다른 여자들과 함께 수영장 주위를 행진했다.
토마시는 천장에 매달린 바구니 안에 서서 큰 소리로 외치며 노래를 부르고
무릎을 꿇으라고 명령을 내렸다.
어떤 여자가 동작을 틀리면 그 여자를 권총으로 쏘아 죽였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밀란 쿤데라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공포는 위의 ‘테레자’의 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부분을 읽으며 저는 대학 때 ‘컬트 무비’ 상영회로 보았던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 ‘8과 1/2’ 중 한 장면이 떠올랐는데요.. 워낙 괴이한 영화라 기억이 깊이 남아 있었나 봅니다 (뒷부분에 작가가 페데리코 펠리니를 언급하는 걸 보면 이 영화에서 영감을 얻었을 수도 있겠다 싶더군요)
‘테레자’는 다른 ‘육체’들과 자신이 동일하게 (가볍게?) 취급 받는 것에 대한 공포를 느낍니다. 이는 그녀에게 계속적인 트라우마로 남아 있게 되죠. 이런 상징들이 이 작품들에는 절묘하게 깔려 있습니다. 작가의 언급대로,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작가의 경험의 산물일 텐데.. 이런 구체적 상상들은 어떤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걸까요? 왜 이 작품이 그렇게 오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 왔는지를 알 듯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소유냐 존재냐를 읽고 있었고,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터라 이 두가지 프레임에서 이해를 했는데.. 다른 분들과 토론을 해보니 확실히 생각이 많이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확실히 같은 책을 읽어도 각자 자신의 틀 안에서 보게 되나 봅니다.
* 인용된 시는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