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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프로 Apr 14. 2020

조영남을 위한 변명 <미학 스캔들>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눕니다]

첫인상이라는 게 참 중요합니다. 이 책의 저자인 '진중권'이라는 이름의 이미지는 대체로 비호감에 가깝겠지만, 개인적으로 '진보논객'이라는 수식어가 붙기 훨씬 전 미학 오디세이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었던 지라.. 적어도 '미학 전문가 - 진중권'에 대해서는 꽤 호감을 가지고 있는 편이죠. (학창 시절 그렇게 좋아했던 작가인 이문열, 공지영 두 분에 대해서 '변했다!'라고 생각하고 작품까지 멀리한 것과 좀 모순되긴 한데, 아마 창작을 하는 분들이 현실에 깊이 들어온 것에 대한 거부감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분들 개성이니까요..)


그리하여,,  <미학 오디세이>의 아류 같은 느낌의 '미학 어쩌고'라는 출간기념강연이 있다하여, 무슨 내용인지 확인도 하기 전에 부랴부랴 신청부터 하게 됐죠.


책의 내용에 대해 강의를 하고 있는 진중권 (이제는 前) 교수


강연 및 책의 주제를 간략이 정리하면 현대 미술에서의 저자성이라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화가가 직접 그렸다는 '친작'의 개념에 대한 설명과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책을 내게 된 배경은 바로 이 분(아래) 때문이죠.


한때 '현대미술 하는 가수'로 유명했던 조영남 씨


강연이 시작되고는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앞서 제가 '비호감'을 언급했지만.. 조영남 씨에 대해서는 원래부터 많이 '비호감'이었고 굳이 그분에 위한 변명을 들으러 여기까지 왔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죠. 그러나 저자가 의도했던 바와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친작성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르네상스부터 현대미술까지를 설명하는 과정은 꽤 흥미로운 내용이었습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은 '친작(親作)'이라는 개념의 허구성입니다. 왜 우리는 예술가의 직접적인 '터치'에 대해 그렇게 민감할까? 에 대한 내용인데요, 사실 이러한 오해(?)의 원인 중 하나는 숱한 영화나 소설 등에서 고뇌하는 천재, 시대를 잘못 만나 인정받지 못하는 비운의 예술가 등 예술 작품은 한 개인의 순수한 노력의 결과물이라는 클리셰가 강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천재성의 신화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예술가가 자기 손으로 직접 그린 그림'이 '친작'이라는 관습은 비교적 최근의 현상이다.
그 관습이 어느새 관행으로 굳어지자 과거에도 당연히 그랬을 것이라는 착각도 하게 된다.

미학 스캔들 - 진중권


하지만 <미학 스캔들>에서 저자는 미켈란젤로, 렘브란트, 루벤스 등의 예를 들며 르네상스 시대 이후 지속적으로 미술 작품 역시 공방(보테가)를 통해 여러 형태로 본인 외의 다른 공동 작업자 (동료, 제자 등)와 함께 만들어졌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과거의 예술 작품은 주문자 (요즘으로 치면 클라이언트, 광고주)가 있고 작가는 그에 따른 잘 만든 결과물을 납품(?)을 하면 되는 것이기에 수석 장인(Maestro)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는 것이죠.


다만 이후 낭만주의 시대가 되며, 성당이나 소수 귀족의 주문 생산 방식이 아닌, 부르주아 계층에 의한 시장이 열리면서 작가의 개성이 중요해집니다. 이제는 목적 (종교나 정치)에 따른 주문이 아닌 작가의 천재성(Genius)을 사게 되죠. 이러한 신화적 가치를 '아우라'(형광등 100개가 켜지진 듯한..)라고 합니다. 예술 작품은 어떤 천재적 작가의 고통스러운 창작의 결과물이며, 이는 현재도 대다수의 대중들에게 유효한 믿음입니다.


천재적 광기의 이미지에 고흐만큼 적합한 작가가 있을까?




아우라의 붕괴 - 현대 미술의 시작


산업혁명은 사물의 세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과거에 모든 사물은 그 하나하나가 장인이 손수 빚은 원작이었다.
하지만 산업혁명은 원본을 몰아내고 사물의 세계를 온통 복제물로 채워 넣었다.

미학 스캔들 - 진중권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현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현대'의 예술이라면 이러한 '현대성'을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 새롭게 등장하는 예술가들의 생각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미술관에 갈 때마다 현대미술 전시실 쪽으로 가게 되면 이들의 작품(?)을 보고 매번 실망을 하게 됩니다. 저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관람객들이 '모나리자'나 '해바라기' 등의 그림을 실물로 영접하게 되면 감탄을 하려 기념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지만, 현대 미술은 그냥 무심코 지나쳐 가는 경우가 많죠. (굳이 멀리 뉴욕의 MoMA까지 가서 고전 작품만 보는..)  


도대체(이따위 걸 작품이라고 내놓는) 현대미술 작가들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현대미술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뒤상의 <샘>


관람객들을 조롱하는 듯한 이 작품, 작가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걸까요? 더구나 본인이 직접 만든 것도 아닌 이 공산품에 어떤 예술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걸까요? 저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뒤상에 이르러 미술은 "망막적" 현상에서 "개념적" 작업으로 바뀐다.
바로 이것이 뒤상이 20세기 미술에 일으킨 개념적 혁명의 시작이었다

미학 스캔들 - 진중권


현대 미술에 이르러서는 저 '변기'를 보라는 것이 아니라, 왜 변기를 놓았는가? 왜 변기를 선택했는가? 에 대한 개념이 더 중요해졌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사진으로 자연을 담을 수 있고, 기계로 얼마든지 우수한 제품들을 찍어낼 수 있는 시대에 더 이상 '장인'의 능력이 중요해지지 않다는 거죠.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또는 어떻게 형식을 파괴하는가? 에 대한 것이 작가의 독창성이 됩니다. 다시 위에서 인용한 글을 곱씹어 보자면, 현대미술은 눈으로 느끼는 감성적인 작품이 아니라, 머리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직 이러한 개념에 익숙지 않습니다. '미술' 하면 스케치북과 붓을 먼저 떠오르게 되고, 존경하는 미술가라 하면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을 떠올릴 수 있지만, 뒤상이나 릭턴스타인, 앤디 워홀 등을 연관 짓기는 쉽지 않죠. 바로 이 와중에 '조영남 사건'이 발생합니다.


저자가 다양한 채널에서 논쟁을 벌이고 이 책까지 낸 것은 '조영남'을 옹호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 '현대미술'에 대한 몰이해를 보이는 미술계와 대중에 대한 ‘깊은 빡침’입니다 (원래 잘 빡치니 이해는 갑니다)




현대미술에 '친작성'은 필요한가?


르네상스 이래 화가의 개성과 어떻게 그리느냐는 문제에 중점을 두게 되면서 미술품이 예술가의 자주적 인격의 소산이라는 의식이 강화되었고, 19세기 인상파 이후로는 화가가 조수의 도움 없이 홀로 작업하는 것이 근대미술의 일반적인 경향이 되었습니다....

한국미술협회 등 화가 단체의 조영남 고소장 中 진중권 <미학 스캔들>에서 재인용.


작가는 위의 고소장에서 교묘하게도 근대미술까지의 개념만 인용하고 '아우라'의 파괴가 중심이 되어 온 현대미술의 개념은 (일부러) 누락시킨 것에 분개합니다. 20세기에 걸쳐 탈피하려고 했던, 고흐의 시대로 회귀하려 한다는 것이죠.


오늘날 어렵게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신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예술가들은 고흐의 재현입니다. 작가는 이 '거룩한 아우라'를 '가수 나부랭이'가 깨버린다는 것이 미술계가 보이는 분노의 실체라고 비판합니다.


현대 미술에 있어서는 '개념'이 중요합니다. 레디메이드 상품을 가져다가 의미를 부여한다고 해도 작품이 될 수 있습니다. (뒤상의 예에서 보이듯). 조영남의 그림을 대작했던 '조수' 역시 작품의 개념을 준 것은 '조영남'이었기에 그의 작품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조셉 쿠수스 - 하나 그리고 세계의 의자 (각각 사진과 실물, 그리고 텍스트입니다. 진짜 '의자'는?)




조영남의 대작은 왜 문제가 되나?


진짜 문제는 현대 미술에 있어 조수를 쓰는- 또는 대작을 하는- 것이 가능하냐는 원칙적인 부분은 아닐지 모릅니다. 대작 작가 (순수한 예술을 하는)를 써서, 화가인 척하는 가수의 존재가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입니다. 아마도 과거 모 아나운서의 대필 사건(정확히는 대리 번역)과도 통하는 면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간 작가로 인정하지 않았던(할 수 없었던) 이상한 작품을 그리는 가수를 탐탁지 않게 여기다가, 대작 사건이 터지니 '역시!' 하게 되는 것이죠. 저 역시 언론에서 대작 문제가 터졌을 때 그럴 줄 알았다(뭘?)라는 생각을 하긴 했습니다.


가수가 연기를 한다거나, 배우가 책을 낸다거나 하는 것들은 어느 정도 용인하는 분위기가 되었습니다만, 아직 순수(?) 예술로 남아 있는 미술 분야는 그런 관용성이 베풀어지기 어려운 면이 있는 듯합니다.


'조수'를 써서 그린 화투 그림. 이것은 누구의 작품인가?


누군가 나 대신 내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실크스크린을 해서 내 그림이 내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의 것인지 알 수 없게 된다면 아주 멋질 것이다.

앤디 워홀 - 진중권 <미학 스캔들>에서 재인용.


작가는 책(미학 스캔들)과 숱한 기고들을 본인의 주장을 관철 시키기 위해서 작성했겠으나, 저 개인적으로는 이에 대해 뚜렷한 입장을 가질 깜냥은 아닙니다. 다만, 이러한 논쟁을 통해 '현대 미술'의 개념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에 만족하고 있죠. 기회가 되면 현대 미술에 대해 좀 더 이해를 넓힐 수 있는 경험을 하면 좋을 듯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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