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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프로 Nov 27. 2020

루스 베네딕트, 국화와 칼 1

일본과 일본인의 모순성에 대한 연구

'국화' 그리고 '칼'은 모순(矛盾)을 상징합니다. '국화'가 그들의 예술적 기질을 뜻하던, '천황'을 뜻하던, 칼은 그에 상반되는 이미지로 쓰입니다. <국화와 칼>은 기본적으로 일본인과 일본의 모순됨을 설명하고, 그에 대한 이해가 쉽지 않음을.. 그럼에도 그 '모순'을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함을 주장하죠. 

국화와 칼 초판본.


하지만, (좀 삐딱하게 보자면) 어느 민족이나 국가도 모순이 존재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요? 멀리 40년대 미국이나 유럽을 불러올 것도 없이, 현재의 미국이 돌아가는 걸 보면 하나의 나라가 맞는지 의구심이 생깁니다. 그런 면에서 베네딕트의 이 말을 먼저 새겨둘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일본인들이 그들의 전체 모습을 있는 그대로 기록했다는 말은 아니다. 어느 민족도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일본에 대해 기술하는 일본인은 종종 진짜 중요한 문제들을 빠뜨린 채 그냥 넘어가곤 한다. 그것들은 일본인에게 그가 호흡하는 공기처럼 너무도 익숙하고 또한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인이 미국에 대해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국화와 칼 | 루스 베네딕트


베네딕트가 상정하고 있는 '우리'(미국인 또는 서양인, 이 책에 '우리'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주로 일본인과 비교를 할 때 쓰입니다)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을 전제하고,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서술은 이해가 어려운 사례들을 주로 끄집어내어 비교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아래 글을 보면, '평등을 사랑하는 미국인'이라는 전제로 비교합니다. 정말 미국은 평등을 사랑할까요? 베네딕트의 말처럼 스스로에 대해선 '공기처럼 익숙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걸까요? 아니면 미국인 중 평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제한된 서술일까 궁금해지더군요.


평등을 사랑하는 미국인에게 일본인의 그와 같은 신념과 확신은 낯설기만 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일본인에게 계층적 위계질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런 위계질서 안에 귀속됨으로써 일본인들이 얻으려는 이득과 장점은 무엇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국화와 칼 | 루스 베네딕트, 박규태 저


나는 관대하다. 너희를 이해하기 어렵지만, 최대한 노력해 보마...


물론 당시 미국은 어떻게든 일본을 이해해야만 하는 입장이었으므로 부족한 정보와 편견 속에서도 연구를 진행했을 겁니다. 왜 그들은 납득이 가질 않는 일본인에 대해 그토록 알고 싶어 했을까요?




왜 일본에 대한 연구가 필요했나?


일본은 1941년에 하와이의 진주만을 급습합니다. 2차 세계 대전을 관망하고 있던 미국은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되는데, 이 과정은 영화 '미드웨이'에 가장 잘 나와 있죠. 영화적 재미를 약간 포기한 듯 하지만, 다큐멘터리로 보면 꽤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일본에 대해 아는  없었습니다. '정치적 부족주의' 따르면 베트남 전이나 걸프전 때도 그닥 상대에 대한 이해는 없이 싸운 모양이지만, 이때는 나름 공부  했던  같습니다. 베네딕트가 일본 연구에 뛰어들게  계기도 그런 과정이었고, 넷플릭스에서   있는 아래 영화도 그렇게 만들어졌죠.(반대로 이 영화를 보면 1940년대 일본인, 또는 동양인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유럽에서의 '일본'이란 다소 ‘신비의 나라’ 이미지였죠. 우리는 일본이 개항(페리 제독에 의한) 되기 전까지는 조선과 별 다를 바 없이 서양 세계와는 별 교류가 없던 것으로 오해하는데.. 사실 일본은 꽤 오래전부터 유럽(주로 네덜란드를 통해서)과 활발한 교역을 하고 있었죠. 


도자기를 통해서 중국식 문화가 서양에 전파되었다... 하지만 1601년 징더전 도기공들의 노사 분규를 시작으로 1675년 만주 반란군에 의한 파괴 등 17세기 들어서 여러 차례의 민란으로 징더전의 도자기 공장은 점차 파괴되었다...

중국 징더전이 파괴된 틈을 타서 도자기 유럽 수출의 기회를 잡게 된 일본은 도자기가 이동 중에 파손되지 않게 종이로 도자기를 포장하였다. 이때 사용된 포장지가 목판화로 찍어 낸 그림들이었다. 이 그림들은 우키요에(Ukiyo-e)라는 목판화로, 세 가지 정도의 색을 조합해서 총천연색 그림을 대량 생산했던 기술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일본의 밝고 화려한 색상의 우키요에 목판화가 서양에 알려지게 됐고 훗날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1853~1890)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의 그림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공간이 만든 공간> 유럽을 바꾼 도자기, 유현준


유럽에서 일어난 일본 문화의 붐을 '자포니즘(Japonism)'이라고 하는데, 인상주의는 특히 '우키요에'(이 글의 커버 이미지로 쓰인 그림이 대표적인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미국은 일본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가 크게 두 가지면에서 충격을 받게 됩니다.


첫째는 자신들이 개항시킨 일본이 불과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뒤통수를 친 거죠. 사실 이건 태평양 주도권을 놓고 벌이는 미국과 일본의 싸움이었습니다. 둘째는 개별적 전투에서는 끝까지 항복1)을 하지 않던 일본이, '천황2)'의 항복 선언 이후 철저히 굴복했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달라질 수 있나? 이해가 되질 않는 거죠. 


그렇기에 미국은 전쟁 중에도, 그리고 전후에도 일본에 대해 좀 더 알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베네딕트의 인식은 기본적으로 '적국'에 대한 분석입니다. 물론 최대한 학자의 입장에서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는 베네딕트의 인식이 아니라, 당시 미국 및 서구의 전반적 분위기가 영향이 있었을 것입니다.


1) 왜 일본은 항복을 하지 않았나? 그에 대한 답은 아래 글 보면 알 수 있다.

일본인에게 명예란 포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싸우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절망적 상황에 몰렸을 때 일본군은 최후의 수류탄 하나로 자살하든가 아니면 무기도 없이 적진으로 돌격해 집단자살을 하든가 해야지, 절대로 항복해서는 안 된다 (국화와 칼 중)

2) '천황'은 왜 '덴노'라 표기하지 않고, 쇼군(將軍)이나 다이묘(大名)는 왜 '장군'이나 '대명'이라고 부르지 않을까?




'국화와 칼' 버릴 것과 남길 것


<국화와 칼>은 1940년 대에 쓰였습니다. 약 백여 년 전 '조선'에 대해 쓰인 책으로 지금의 한국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미친 거 아냐? 싶겠죠. 자존심도 상할 거구요. 얼마 전 브런치에 남겼던 <조선, 그 마지막 10년의 기록>이 바로 그런 책입니다. 



위 책을 쓴 제임스 게일은 물론 전문적인 학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 책은 한국인이 읽어도 낯선 느낌이죠.


베네딕트는 일본의 군사적, 경제적 성취 때문인지, 상대적으로 '미개'하게 느껴지는 부분들에 대해 부각을 하고 있는데.. 마치 '조선, 그 마지막 10년'에서도 언급했듯, 당시 상황을 보고 '조선인은 더럽고 게으른 민족이다'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과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왜 이 책은 지금까지 꾸준히 읽힐까요? 그리고 한국에서도 일본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때 항상 <국화와 칼>이 등장할까요?


이유는  <국화와 칼> 내부와 외부에서 각각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책 내부의 원인을 보자면, 저자는 많은 일본인들을 심층 인터뷰하면서 연구를 진행했고 (정작 일본에 직접 가보진 못했다. 당시 일본과는 전쟁 중이었으므로..) 이에 따라 일본인들의 심중에 있는(mentality) 부분에서는 지금도 참고될 부분들이 많습니다. 


책 외부의 원인을 보자면.. 일본이라는 나라의 독특함인데, 섬나라여서일 수도 있겠으나 그들만의 특성이 변하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지금도 흔히 일본을 갈라파고스에 비유하는 것도 이러한 면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라 생각이 되는군요.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건 작년이었던 것 같은데.. 이런저런 이유로 끝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 최근에서야 다 읽게 되었습니다. 리뷰를 쓰기 위해 가물거리는 기억을 더듬다가 앞부분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읽다 보니 또 새로운 면이 있어서 리뷰 자체가 길어지고 있네요...


대충 작성해 놓은 얼개로 봤을 때 이미 위에 작성한 내용만큼 추가로 글이 이어질 것 같아서 일단 여기서 마무리하고 추가로 작성해 올리고자 합니다..


오늘 내로는 무조건 올리겠다는 다짐을 지키려는 비겁한 타협일 수도.. ㅎㅎ


여튼.. 추가로 작성할 내용은 빚지고는 못 사는 일본인의 심리에서 비롯되는 '기리, 기무, 온, 하지' 등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 부분이 국화와 칼의 정수이자 이 책이 지금도 읽히는 이유가 아닐까 싶더군요..


2번째 글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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