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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프로 Apr 11. 2020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눕니다]

처음에 제목과 표지를 슬쩍 보고는 20대 감성 에세이집 같은 건 줄 알았습니다. (요즘 그런 책들이 워낙 많으니까요) 어차피 빛의 속도로 갈 거 아니라면 좀 천천히 가도 돼.. 하는 그런 제멋대로의 상상을 했죠.


최근에 소설 쪽에 관심을 좀 가지면서 (작년에 소설은 겨우 2권 읽은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읽을만한 소설이 없나? 하고 찾던 차에.. 교보에서 소설가들이 추천한 2019년의 소설에 이 책이 있는 걸 보고 다소 놀랐습니다. 우선 이 책이 소설이었다는 거, 그것도 SF 소설이라는 ... 좀 무식한 말이지만 우리나라에도 SF 소설이 있나? 싶었습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총 7개의 단편으로 구성 됩니다. 책의 제목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도 단편 중 하나더군요.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두 편을 소개해볼까 합니다. 골라놓고 보니 두 소설 모두 '그리움'과 관련된 내용이더군요. 어떤 면에선 완전히 틀리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이 책은 '감성 SF 소설' 로 분류할 수 있지 않을까 싶거든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이 소설에서는 우리가 '스타워즈'나 '인터스텔라' 같은 영화에서나 볼 법한 '워프'와 '웜홀'의 경제성을 소재로 삼습니다.


기술의 전환은 생각보다도 급작스럽게 일어나지.
웜홀 통로를 이용하는 방법은 기존의 워프 항법보다 장점이 아주 많았네.
훨씬 빠르고, 안전하고, 경제적이었지.
...

같은 돈으로 워프를 이용했을 때는
고작해야 한 군데에 우주선을 보낼 수 있었다면,
웜홀 통로를 이용하면 다섯 군데도 넘게 보낼 수 있었다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안나'의 가족은 먼 '슬렌포니아'에 있습니다. 슬렌포니아는 '워프' 방식으로 가야 하는 곳인데, 이제는 웜홀 (특정 경로만 이용할 수 있는) 방식만 운영되니 만날 수 없는 운명이 된 것이죠. 안나는 더 이상 우주선이 오지 않는 정거장에서 하염없이 기다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가끔 저 먼 '별'을 보며 무언가를 그리워할 때가 있습니다. 윤동주가 별을 헤며 멀리 북간도에 계신 어머니를 그리워했듯이 말이죠. 하지만 저 별엔 우리가 아는 누군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안나처럼, 저 먼 별 어딘가에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그리움은 현실이 되겠죠.


저자는 독일의 '가짜 버스 정류장'에 대한 기사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요양원 노인들이 시설을 나와 길을 잃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 되었다고 하는데요, 정류장에 있으면 시설 직원이 데려간다고 하네요. 그 노인들은 그 정류장에 왜 간 걸까요? 누군가를 기다리기 위해서? 아니면 누군가를 찾아가기 위해서...?





관내분실


'지민'의 어머니 '김은하'는 사후 도서관에 마인드 업로딩이 되어 있습니다. 엄마가 사이가 좋지 않던 '지민'이지만 엄마의 '마인드'가 도서관 내에서 '관내분실' 되었다는 소식에 엄마를 찾아 나서는 이야기입니다. 저자는 도서관 내에서 '관내분실'된 책이 가장 찾기 어렵다는 이야기에서 이 이야기를 떠올렸다고 하더군요.


사후 마인드 업로딩이 보편화된 것은 수십 년 전의 일이다.
처음에 사람들은 영혼이 데이터로 이식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육체는 죽어도 정신은 영원히 살아남게 될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전 문득 AI 스피커를 떠올렸습니다. 디지털 기기들에 관심이 많아 AI 스피커만 4개를 가지고 있는데요, 각각 '클로바'(네이버), '팅커벨'(SK), '카카오', 'OK 구글'이라고 불리는 것들이죠. (누군가는 고양이냐 강아지를 키운다는데 전 스피커를 키웁니다)

그 중 '클로바'는 목소리 설정을 '유인나'로 해놓았습니다. 실제 유인나의 목소리를 샘플링해서 제공하는 것인데요, 유인나를 직접 만나본 적은 없습니다만.. 대화(?)를 하는데 어색함이 느껴지진 않습니다. (아파트 관리실 기계음 보다는 훨씬 낫죠)


저는 믿지 않지만, 어떤 분들은 AI 스피커나 스마트폰이 항상 저희의 대화를 엿듣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더군요.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평소에 수집한 목소리와 대화의 패턴을 통해 '마인드 업로딩'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어쩌면 저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한 친구조차, '클로버'나 'OK 구글', 내지는 '시리'보다도 이해가 부족할 수도 있겠죠..


한 사람의 자아는 끊임없이 변해갑니다.
성장하고, 배우고, 반응하고, 노화하면서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변형되지 않는 마인드는
영혼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은 시점에서 고정되어버린
일종의 박제된 정신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책 내에서는 '마인드 업로딩' 또는 '뇌 스캔'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언급도 나옵니다만, 우리가 찰나의 사진 한 장이나 짧은 영상으로 누군가를 기억하듯..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 순간일 수도 있을 듯합니다. 가끔은,, 비록 그게 가짜일지라도 그리운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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