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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레드밀 Mar 01. 2024

밥 한 번 먹자

그냥 하는 말이라고?

난 참 말을 융통성 없게 받아들이나 보다. 밥 한 번 먹자고 말하는 사람에게 언제가 좋겠냐고 바로 되묻는 게 이상하다는 말이 너무 이상한. 차라리 융통성 없는 게 다행이다 싶은 사람이다. 난 이게 이상한 거라는 걸  최근에 와서 알았다. 소위 맘에 없는 소리는 잘 못하다 보니 같이 밥 먹기 싫은 사람에게는 언제 한번 밥 한 번 먹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 내가 해온 '밥 한 번 먹자'는 난 너랑 좀 편안하게 오래 얘기하면서 너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는 말이었다. 이걸 빈말이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는 요즘 사람들의 문화? 행태? 가 당혹스럽다. 




물론 우연히 만난 얼굴도 가물가물한 동창이 어색하게 반가운 척 '연락해~ 언제 밥 한 번 먹자'라고 한다고 그걸 붙잡고 그래서 언제 시간이 괜찮은지 묻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나라면 이런 상황에서도 맘에 없는 연락하자는 소리는 안 한다. 적어도 가물가물하지만 좋은 기억이 한두 개는 떠오르는 사람인데 근처에서 일하거나 살고 있다는 말을 들었으면 '어 그래? 여기 있는 줄 몰랐네. 나 시간 많은데 언제 한번 볼까?' 정도로 한 발짝 다가가는 정도의 관심을 보인다. 상대가 다가올 수 있도록 여지만 줘놓고 아쉬워하지는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다. 뒤집어 생각해 보니, 내가 무시한 어색한 반가운 척이라고 생각했던 밥 한 번 먹자라는 말 중에 나처럼 진심이었던 사람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난 참 사람을 좋아한다. 그래서 인간관계에 진심인 편이다. 내 이런 성향은 참 오래전 최초의 친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최근이라면 내 일터와 가까운 회사에 다니는 친구들을 찾아가 같이 점심 먹는 게 즐거움이었다. 더 이전 대학시절엔 여러 친구들과 있을 때 하지 못하는 얘기를 밤샘 전화통화로 하는 편이었다. 그렇다 보니 학교에서 늘 웃고 떠들어도 그 친구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고 자부했다. 그 덕분에 회사 다닐 때까지 주기적으로 연락하는 중고등친구들, 대학친구들이 있거고 회사사람들하고도 관계가 좋았다. 


중고등 친구들과 30년이 넘게 이어져 오고 있는 것도 내 그 진심 때문이 었다. 그렇다고 40 중반을 넘은 지금의 나이에도 가족보다 친구들이 먼저라거나 친구들과 정기적인 모임을 하는등 자주 만난다는 건 아니다. 가장 적극적인 그룹은 카카오톡 단체채팅을 하는 그룹이 있고, 그밖에는 해외에 사는 친구들도 있고 내가 지방으로 이주해서 다들 멀리 있기 때문에 종종 소식을 묻는 게 다다. 나도 한창때는 몰려다니던 친구들도 있었고, 몰려다니다 소원해진 관계들이 있다. 그 경험으로 난 표면적인 관계의 가벼움을 알았고, 그런 관계가 나를 힘들게 한다는 걸 배웠다. 내 좁고 깊은 인간관계 성향은 표면적인 관계를 원하는 이에게도 눈치 없이 종종 파고들어오는 부담을 주기도 했나 보다. 내 그런 쓸데없는 진심, 원하지 않는 곳에 쏟았던 마음이 혼자 상처로 남았던 적도 많다.


내가 진심으로 누군가를 대했는데 상대방은 나에게 그렇지 않다고 느껴질 때 인간관계에 대한 회의도 들고 상처를 받는다. 이만큼 나이를 먹고 보니, 정말 정리해야 될 관계도 있고 또 적잖이 서로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 친밀한 관계가 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더라. 내가 먼저 마음을 열었는데 상대방은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그게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고, 때로 적당히 거리를 두며 인사치레로 밥 한 번 먹자며 나를 후보에 올려두고 있었는데 나는 진심이 아닌 밥 한 번 먹자는 말을 남발하는 사람을 그냥 열외 시켜버리기도 한다.


글을 쓰며 생각해 보니 이 부분에서 후회는 없다. 그게 진심인지 아닌지 파악하려고 애쓰는 건 어차피 낭비라는 생각이 든다.  내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을 예상하고 귀담아듣지 않을 이야기들을 하고 오히려 그 이야기를 다음번에 이어가려 하면 그건 그냥 해본 말이지 라며 내 관심이 고스란히 허사가 되는 경우도 많다. 이 부분에서 나는 아니라고 자신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나도 분명히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이야기가 공감이 가지 않을 경우 그냥 흘려들었을 수도 있다. 인간관계에 진심이었던 건 그때의 내가 의도했던 일도 아니고  그저 마음이 향하는 일이었다. 나는 누군가를 알게 되면 그 사람을 외모와 성격은 물론이고 서사를 아는 게  '그 사람을 아는 것'이라고 여겼었다. 적어도 친구라고 부르려면 그래야 된다고 생각했었다. 


인생의 중반기인 지금의 나는 나와 가장 친하다. 외부를 향하던 나의 마음이 나를 향해 돌아왔다. 내가 좋아하는 밥을, 내가 먹고 싶은 시간에 먹고,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는 시간이 누군가의 서사를 알아가는 것보다 즐겁다. 어쩌면 고만고만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이상 흥미롭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단순히 누군가를 흥미로만 대하는 건 아니지만, 사람들이 생각보다 타인의 진심 어린 관심에 감동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호응이면 좋아하더라는 게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배운 바다.


고등학생이 된 딸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친구관계에 연연하지 않았다. 나는 그게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가끔 곤란하기도 했다. 종종 우리 아이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친구에게 대신 미안해야 했기 때문이다. 집에 있기 싫어했던 나의 어린 시절과 달리 이 아이는 집에 있는 걸 좋아한다. 저 혼자하는 소소한 일들을 좋아하고 친구들보다 부모와 시간보내기를 더 편안해한다는 걸 눈치챘다. 내가 집에 있는 게 즐겁지 않았던 건 어린 나에게 요구되는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기 때문에 빈둥거릴 수도 있는 건데 나의 아버지는 그걸 그냥 보지 못했다. 그런 난 위안받을 피난처가 필요했고 그걸 다른 사람에게서 찾으려 했다. 다행히 친구관계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늘 외롭다는 걸 커갈 수록 절감했다. 내가 40이 넘어서야 나와의 시간을 즐길 있게 된 데에 비해 이 아이는 나보다 훨씬 빨리 그걸 배운 거다. 


내가 수도없이 되새긴 '내 부모 같은 부모가 되지 않겠다'는 다짐에서 적어도 하나는 성공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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