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동방박사 민희
책작업이 마무리되고 있던 어느 날. 편집자님께서 추천사를 부탁하고 싶은 사람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그 물음에 한 사람을 떠올렸다. 민희. 내 첫 번째 동방박사 친구 천문학자 민희였다. (연말에 TVN 벌거벗은 세계사 크리스마스 특집에 그 천문학자 현민희 박사님. 그분이 맞다. ^^)
우리는 과학 창의재단에서 개최된 어떤 행사에 초청되어 처음 만났다. 어떤 사안에 대해 각자의 위치에서 토론하는 자리였는데 우린 그 행사가 끝나고 번호를 주고받았다. 나는 평소에 과학을 취미로 하면서 책도 보고, 과학 창의재단 수업도 들으면서 천문학 하는 분들을 막연하게 동경했었다. 그런데 민희가 딱 내 앞에 나타났다. 내가 실제로 처음 사적으로(?) 만나본 천문학자였다. 나는 끝없는 구애를 했고, 민희도 내 구애를 받으며 또 다른 구애를 했고... 우린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사실 이런저런 행사를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거기에서 정말 인연이 되는 사람은 몇 없기 때문에 서른이 넘은 나이에 일하는 중에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대개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우린 이상하게도... 아주 이상하게도 그걸 가뿐하게 뛰어넘었다. 우리는 문자 카톡은 물론이거니와. 전화도 하고 심지어 우편으로 편지도 주고받는 친구가 되었다.
3월. 내가 뮤지컬 공연을 하고 있을 때 민희를 초대했고 엄마와 함께 방문한 민희가 커다란 케이크를 사줬다. 오랜만에 대학로 공연도 보고 엄마랑 데이트해서 행복했다고 말해줘서 나도 행복해졌다. 내가 이런 모습을 보려고 공연을 하는구나 싶었던 순간 중 하나였던 것 같다. 그리고 민희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데이트를 신청했고 명동에서 만나 파스타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했었다. 나는 민희가 정말 자기가 하는 일을 사랑하는 모습이 좋았고, 내가 궁금한 걸 물어보면 박사님처럼 (그녀는 박사님이 맞다) 거침없이 설명해 주는 게 멋있었다. 게다가 내가 언니이긴 한데 가끔 언니처럼, 아니 인생 다 산 우리 할머니처럼 명쾌하지만 다정한 조언을 해주는 그녀가 따뜻해서 좋았다. 나는 원래 사람을 잘 챙기는 성격도 아니라 무심하게 살고 있으면 어느덧 잘 지내냐 보고 싶다 해주는 예쁜 동생이었다. 그래서 서툰 나도 그녀에게 애정표현을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정말 특별해서, 정말 고마워서...
그녀는 평일에는 주로 대전에 있기 때문에 주말마다 서울에 와서 시간이 될 때마다 내 안부를 물었다. 우리 엄마랑 박경찬 연출님. 내 조절친 다음으로 나와 끈질기게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 되었다. 가끔 몹시 외로운 밤. 민희 전화가 위로가 되기도 했고, 사람 때문에 마음 고생할 때는 속 시원한 이야기들을 호방하게 풀어놓으며 날 웃게 해 줘서 고맙기도 했다. 현실에 갇혀 있을 땐 그녀가 전 세계를 여행이며 학회로 돌아다니며 겪었던 일들을 들으며 이렇게 삶을 즐기는 사람이라니 참 멋지다 생각하기도 했었다.
이렇게 지내고 있던 와중 편집자님에 나에게 물었다. 추천사를 써 줬으면 하는 사람이 있는지. 그래서 나는 숨도 안 쉬고 민희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는 민희에게 연락해서 물었다. “민희야 네가 내 첫 책의 추천사를 써 줄 수 있을까?” 민희는 정말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고맙다고 말했다. 민희도 인생 첫 추천사라고. 이 얼마나 영광인 일인가. 사실 내게 추천사를 써 준다는 것의 의미는 편집자님과 나이 외에 또 다른 첫 비밀 독자가 생긴다는 일이었다. 민희가 천문학을 하니까 이 이야기를 어떻게 읽을지 궁금하기도 했으니까. 민희에게 읽는 김에 혹시나 중간에 오류 같은 게 보이면 제보해 달라는 업무까지 부탁했지만 민희는 즐겁게 책을 읽고 추천사를 써 줬다. 고마웠다. 그리고 민희가 내 인생 첫 책이 추천사를 써 준 것이 매우 기뻤다. 그렇게 민희는 내 인생에 일어난 특별한 일을 함께한 사람이 되었다.
책이 나오고 한 달이 지나도록 실제로 바쁘기도 했고, 마음이 바쁘기도 해서 온전히 출간을 기뻐할 틈이 없었다. 그렇게 지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적어 책을 전달하는 것도 지연되고 있었다. 서점에 가서 내 책을 보면서도 소중한 사람들에게 선뜻 제 책이에요 하기가 쑥스러웠던 것도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한 달의 시간이 흐르고 있을 무렵 민희가 나를 호출했다. 그곳에는 조촐하다고 말했지만 결코 조촐하지 않은 홈파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민희는 사비로 내 책을 열권 넘게 더 사서 나에게 싸인을 요청했다. 소중한 지인들에게 작가싸인 담긴 책을 선물할 거니까 싸인을 하라고 했다. 태어나서 싸인 같은 걸 해본 적이 없어서 그냥 이름과 감사하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덕분에 처음으로 책을 낸 작가가 된 기분이 들었다. 드디어 책이 세상에 나왔다는 게 스스로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많이 기쁘고 벅찼고 조금 울컥했다. 내 일을 자기 일처럼 기뻐해주느라 오후 내내 장을 봤을 수고와, 음식을 만드는 과정들과, 책을 주문해 준 마음이 고마워서. 이렇게 어정쩡하게 지나갈 뻔했던 내 책 출간을 민희가 특별하게 만들어줘서 고마웠다.
앞으로 민희가 하는 일이라면 나도 발 벗고 뭐든 하고 싶다.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많은 걸 같이 하고 싶다. 언젠가 내가 필요하다고 하면 달려와 도와줄 그녀이기에. 민희를 옆에서 보면 그녀가 보고 있는 아름다운 우주를 엿볼 수 있고, 자신이 좋아하는 걸 하면서 눈을 반짝이는 아름다움도 느낄 수 있고, 별거 아닌 것에도 크게 행복해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언젠가 나도 좋은 사람으로 곁에 있으면서 그녀의 도움이 되고 싶다.
그날의 맛있었던 현셰프가 해줬던 음식들과. 풋냄새 폴폴 났던 와인들. 민희가 불렀던 노래들이 내 첫 책을 떠올릴 때마다 함께 기억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