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자들을 위한 러브레터
나는 비평가가 아닌 창작자이므로, 어떤 창작자의 작품에 말을 얹는다는 것은 항상 조심스럽다. 작품의 만듦새와 상관없이 그 작품을 만들기까지의 과정과 창작자들의 고민의 시간, 그리고 수많은 협업들을 존중하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룩백>에 대해서는 꼭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너무 좋았기 때문에, 그것도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렸기 때문에…. 그래서 이 좋음이 왜 좋았는지 기억하고 싶어서 글을 남기기로 했다. 그러니까 이건 비평이나 감상이 아니라 작품을 향한 사랑 고백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이 이야기는 내게 커다란 위로를 주었다. 어떤 지점이었는지 곰곰 생각해 보니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나도 믿지 못하는 나를 믿는다고 말해주는 사람. 나조차도 나를 의심하는 상황에서 나에게 팬(응원해주는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나도 내가 만났던 이러한 몇몇 사람들에 의해 여기까지 왔구나, 그리고 지금도 그 힘으로 앞으로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순간마다 혼자였다면, 난 몇 번이고 이 일을 그만두어도 이상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야기는 커다란 줄 알았던 내 재능이. 작아 보이는 바로 그 순간에서 시작된다. 후지노는 네컷만화를 함께 연재하게 되었지만, 집에 틀어박혀 학교에 나오지 않는 교모토의 그림을 보고 깨달아 버린다. 나보다 위에 있는 누군가를 만나 알게 된 자신의 재능 부족을. 그럼에도 노력하면 어떻게든 될 거라 믿으면서 그림을 그리고 또 그린다. 하지만 또다시 그녀와 나란히 실린 자신의 만화를 봤을 때 또 한 번 느낀다. 자신도 노력했지만, 그 시간 동안 상대방도 노력을 했다는 것. 그리고 저만치 앞서가 있다는걸. 그 순간 후지노는 거짓말처럼 지금껏 노력해 오던 그림을 한순간 놓아버리기로 결심한다. 되돌아보지 않으려 애써 친구들과 어울리고, 가족이 권유했던 가라테도 해 보고. 평범한 또래처럼 지낸다. 하지만 그 마음속은 들끓고 있었을 거다. 절망. 분함. 홀가분함. 안도. 실망. 모멸감 등이 뒤섞여서.
그러던 어느날 두 사람은 서로를 맞닥뜨리게 된다. 후지노는 자신의 꿈의 날개를 꺾어버린 교모토와 마주하며 복잡한 심경이 되었을 거다. 하지만 교모토는 후지노에게 예상 밖의 말을 꺼낸다. “팬이에요!” 후지노는 그 순간 자신 안에서 두 번째 그림 인생이 시작되었다는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계속해도 된다는 허락. 내가 생각보다 엉망진창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희망. 어쩌면 나도 멋진 그림쟁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새로운 가능성들.
아... 이 지점에서 나는 이 작품을 사랑하게 됐던 것 같다. 사실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의 팬이었고, 서로의 등을 보며 함께 달리고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누군가의 재능이 나를 절망시키기보다, 내가 그 재능의 팬이 된다는 멋진 감정! 그렇게 두 사람은 한눈에 서로가 서로의 꿈의 파트너임을 알아본다.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함께 만화 연재를 이어 나가고 싶은 후지노와 미술대학에 진학하고 싶은 교모토는 결국 각자의 길을 가게 되며 헤어진다. 후지노는 집 밖에도 못 나오던 네가 나 없이 대학을 어떻게 가냐는 둥 모진 말들을 쏟아놓지만, 결국엔 교모토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한다. 이 씬의 교모토의 마지막 대사는 “나는 그림을 더 잘 그리고 싶어.”이다. 후지노도 같은 마음이었기에 다른 길을 선택한 교모토를 이해할 수 있었을 거다. 목적은 같지만, 다른 방법을 선택한 두 사람은 그렇게 헤어진다.
여기까지가 이 작품의 시놉시스에 해당한다. 뒷부분은 정말이지 엄청나게 아름답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아직 작품을 보지 않으신 분이 있으실지 모르니 비밀에 부친다.
<룩백>을 보면서 든 생각 몇가지를 정리 해본다.
아직 제대로 발현되지 않아 적당해 보이는 예술적 재능은 주변을 미덥지 않게 만들어 응원하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결국 나만이 나를 믿고 꿋꿋하게 해 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내 주변 예술가들이 멋지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적어도 수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작은 성취일지 몰라도 기어이 해내고야 만 사람들. 우린 모두 이런 성취의 경험을 하나씩 훈장처럼 몸에 새기고 있다.
그리고 ‘재능’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재능이란 무엇인가. 타고나는 어떤 것. 노력해서 얻는 무엇? 둘 다 맞는 말이겠지만, 어쩌면 재능은 ‘이 일을 계속 좋아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남는 능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룩백>을 보면서 나에게도 질문이 하나 던져졌다. 작품 마지막에 직접적으로 던져지는 질문이었는데 ‘왜 창작을 관두지 않고 계속하는가?’이다. 쉬워 보이지만 어려운 질문. 근본을 건드리는 이 질문의 답은 나도 아직 모르겠다. 다만 영화가 던지는 하나의 힌트는 ‘그림을 그리는 주인공이 수많은 등’이다. 모든 재능에는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고, 그러니까 나도 계속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이것이 어쩌면 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영화를 본 몇 개월이 지난 지금에서야 할 수 있게 되었다.
P.S. 후지노가 교모토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기억에 남는다. 내리는 비에도 불구하고 들뜬 걸음이, 빗물을 팔방이며 빙그르르 도는 몸짓에서 내가 노력한 것을 누군가는 알아봐 주었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내가 가장 재능있다고 여긴 교모토에게 가 닿았다는 사실이 기쁘고 또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후지노의 모습이 너무 공감되었다. 후지노는 그렇게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젖은 옷을 갈아입을 새도 없이 다시 책상으로 돌아간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