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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둘 Oct 25. 2022

인생의 황야를 건너는 정신분석 여정

야곱과 하느님의 씨름

[1분 인생 힌트] 인생의 황야를 건너는 정신분석 여정(야곱과 하느님의 씨름)


혼자 치열하게 고민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고민을 해도 끝이 없던 시절. 노트에 적는 글자는 계속 늘어만 가는데 해답은 보이지 않던 시절. 그 때를 생각하면 그 막막했던 느낌에 먹먹해집니다. 닫힌 가슴. 어딘가에서 막혀 버린 듯한 가슴. 심장은 뛰고 있는 걸까? 심장이 뛰고 있는 것이 분명한대도 내가 사는 게 사는 건지 뭔지 종잡을 수 없는 느낌. 인생의 커다란 의문을 가지고 반 쯤 숨이 막힌 채 살아가는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은 태연하게 잘만 살아가고 있는 듯한 느낌. 세상은 잘만 굴러가고 있고 나는 여기 이렇게 동떨어져 있는 것 같아서 참 외로웠던 기억이 납니다. 


어제 책을 한 권 읽었습니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번역의 문제인지 작가의 원래 어투인지 문장이 한 번에 읽히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책을 닫을 즈음에 만난 문장은 천둥소리처럼 내면을 울렸습니다. 


그 문장을 다시 만나 봅니다. 



황야는 신성한 축복을 예비한다.


심리학을 공부하고 심리상담을 업으로 삼고 살면서, 그리고 이 모든 것에 관심과 주의가 쏠리는, 교육 이전부터 지니고 있던 나의 어떤 기질 때문에 모든 것을 마음에 빗대고 마음에 비추어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아래에 인용할 글 또한 다른 방식으로 읽었음을 일러 둡니다. 

브레네 브라운의 <진정한 나로 살아갈 용기>에서 작가가 인용한 지인 젠의 이야기입니다. 젠은 지역 사회 지도자이자 목사입니다. 중도보수 성향의 기독교 공동체에서 성소수자 인권 및 포용을 지지한다고 공공연하게 밝히고 인생의 황야를 경험합니다. 공동체 다수가 공개적으로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는 황야에 선 젠. 그는 어떻게 처신했을까요? 


작가가 젠에게 묻자 젠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돌려서 말할 생각은 없습니다. 황야의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은 뼛속까지 오싹했습니다. 소속감은 아주 근본적이고 필요한 요소인 데다가 무리를 잃고 홀로 가야 한다는 위협은 너무 끔찍한 기분이라 사람들은 대부분 평생 황야를 멀리합니다. 사람들은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며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상대를 편안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나는 불편이 우리세대 최대 억지력이라고 확신합니다. 자기 내면의 신념에 반하는 현상 status quo을 유지하기란 분명히 특권층이 누릴 수 있는 사치입니다. 약자, 소외층, 비주류는 매일같이 황야를 경험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전한 성문 안 대신에 외딴 전초 기지를 선택하려면 정말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 첫걸음에 숨이 멎을 겁니다.


내부인과 외부인을 나누는 권력 구조에 맞서는 발언을 하려면 대가를 치러야 하고 내가 가장 자주 치르는 대가는 소속감입니다. 그래서 황야는 때때로 너무나 외롭고 고통스러우며 이에 급격히 의욕이 꺾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서 아름다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가장 외로운 발걸음은 성벽부터 황야의 중심에 이르는 발걸음입니다. 뒤돌면 안전한 곳이 보이고 새로운 영토는 아직 보이지 않으며 미지의 세계로 가는 길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면서 계속 황야를 통과해 나가면 그곳에 수많은 사람이 사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되죠. 즐기고 춤추고 창조하고 축하하고 소속감을 느끼고 있어요. 그곳은 척박한 황무지가 아닙니다. 무방비 지대가 아니죠. 인간이 번창할 수 없는 곳도 아니에요. 이미 수많은 창조자와 예언자, 체제 저항자, 모험가가 그곳에서 살아왔고 놀랍도록 생기가 넘쳐흐릅니다. 그곳까지 길은 험난하지만 그곳의 진정성은 삶이에요.


황야는 내가 영원히 있을 곳인 것 같아요. 행복한 동시에 힘는 곳이기도 하죠. 민감한 교리 해석 문제로 공개적으로 씨름한 이후 교단의 방침을 돌이킬 수 없도록 깨는 혹독한 첫걸음을 떼고 있을 때 친한 친구에게 문자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창세기 32장에는 야곱이 황야에서 밤새 하느님과 씨름하는 신비롭고 이상한 일화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야곱이 결코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심지어 야곱은 “제게 축복을 내리지 않으면 절대 놓아드리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소리를 지르죠. 하느님은 야곱의 허벅지 뼈를 쥐고 비틀어 고관절에서 빼냅니다. 이는 단호하고 완강하고 끈질긴 사람이 하느님을 상대로 벌인 몸부림을 영원히 기억하라는 표시였죠. 터무니없지만 배짱 있는 행동이었고 괘씸한 동시에 인상적이었죠. 내 친구는 "너는 야곱과 같아. 하느님이 이 자리에서 내게 축복을 내릴 때까지 넌 하느님을 놓지 않고 있는 거야. 하느님은 널 축복하실 거야. 넌 분명히 새로운 땅을 찾을 거야. 앞으로 영원히 다리를 절게 되겠지만."라는 문자를 보냈습니다. 그래서 나는 황야를 선택했습니다.


황야는 내가 진실을 말할 수 있고 힘껏 용기를 내서 앞장서며 동료 비주류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리를 절 때마다 내가 치른 대가와 내 이면에 있는 것, 앞으로 항상 조금은 슬프고 아플 무엇인가가 떠오르겠죠.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을까요? 물론이에요. 그리고 내가 저는 모습을 볼 때마다 황야에 함께 사는 동료들이 나 역시도 고통을 알고 있고 상처 없이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다리를 전다고 해도 황야 댄스파티를 즐기는 데는 조금도 방해가 되지 않을 거예요.



이 이야기는 마치 나 혼자 내 정신을 분석하고 고투하던 시절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끝나지 않는 싸움을 펼치고 있는 것 같았지요. 결국 어떤 의미라도 건질 수 있을까, 삶에 다시 생기가 돋아날 수 있을까, 희망이 과연 있는가, 밑도 끝도 없는 고민을 하면서 내면을 깊이 파헤쳤습니다. 길지 않았던 인생사를 되짚어 보고 어디서 어떤 매듭이 지어져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곱씹기를 수십 번 수백 번, 황야에 선 인간에게 외로움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치열하게 고민한 끝에 어느 날 구원이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조금 가벼워질 수 있었던 것은 황야에 선 인간에게도 삶이 살아진다는 당연한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살려고 하든 살려고 하지 않든, 생생히 살아있다고 느끼든 반만 살아있다고 느끼든 심장은 변함없이 뛰고 있고 죽기 전까지는 늘 이렇게 심장이 뛸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내 마음의 황야에는 반항하는 사람, 좌절하고 낙담한 사람, 소외되고 외로운 사람만 사는 게 아니었습니다. 위 글에서처럼 정말로 수많은 사람이 함께 살고 있었고 그 힘든 시기에도 함께 어울리며 즐기고 춤추고 창조했습니다. 작곡이라고 하기에는 쑥스럽지만 작곡을 처음 했던 것도 바로 그 시기입니다. 황야는 외롭고 쓸쓸한 황무지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내 마음 안에서도 창조자와 예언자, 체제 저항자, 모험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삶의 진정성을 잉태하기 위해서 황야는 반드시 필요한가 봅니다. 


황야를 걷는 동안 상처를 입어야 했고 상처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야곱이 밤새 씨름 끝에 하느님의 축복을 얻는 대신 고관절 부상을 당했던 것처럼 실제로 신체적 부상을 이곳 저곳 당했고 지금도 그 흔적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기능상의 불편함을 매일 느끼고 있음에도 당황스럽게도 사는 재미가 점점 더해가고 있습니다. 이것도 삶의 신비로운 면 중의 하나입니다. 


나 역시 고통을 알고 있고 상처 없이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이 이 사실을 알아주기 전에 내가 알아주길 바라며 다른 고통의 순간에도 기억할 줄 알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림자가 해의 존재를 증명하듯이 삶에 생기와 재미가 넘치는 순간마다 그 시원한 넥타르를 당신과 함께 즐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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