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을 통해 어떤 대표님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나름의 인지도를 갖고 다양한 강연으로 사람들에게 자기 삶을 살도록 도와주고 있는 그분. 점점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그 대표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왜 사람이 행복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거의 즉시 무릎을 탁 쳤습니다. 그분이 어떤 스타일인지 대략 들어서 아는 바가 있었기에 어떤 의미에서 이야기했는지 감이 왔던 것이지요. 이런 걸 줄탁동시라고 해야 할 것 같은 느낌!
그 대표님은 어떤 취지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요? 직접 들은 바도 아니고 후에 해석을 자세히 듣지도 못했지만 짐작이 갑니다. 오늘은 그 짐작을 나누어 드립니다. 행복의 역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봅니다.
행복은 개 뿔 같은 겁니다. 행복은 개 뿔,이라고 쓰고 싶었으나 조금 더 있어 보이도록 유니콘 뿔이라고 했습니다. 행복은 왜 개 뿔이나 유니콘 뿔일까, 궁금하지 않나요? 안 궁금해도 별 수 없습니다. 결국 이 글을 끝까지 읽으실 테고, 그러면 읽기 전보다 조금 더 행복해질 테니까요.
대표님의 말씀을 전개시켜 봅니다. 나는 왜 사람이 행복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아니,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살면서 요새 사람들이 말하는 선한 영향력을 주면서 사람들의 삶을 고취시키는 분, 그래서 참 행복해 보이는 분께서 그런 말씀을 하다니요. 무슨 뜻일까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성공하는 것? 승진하는 것? 돈을 많이 버는 것?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 연인에게 사랑받는 것? 몸이 건강한 것? 자연을 만끽하는 것? 자주 웃는 것? 내 뜻을 펼치는 것? 적기만 해도 좋군요. 다 누릴 수 있으면 참 좋겠네요. 그런데 이런 게 유니콘 뿔입니다.
유니콘을 보신 적 있나요? 저는 아직까지 없습니다. 꿈에서도 본 적이 있나 모르겠네요. 유니콘은 상상 속의 동물이지요. 상상 속의 동물이 가지고 있는 상상의 최종 산물 같은 뿔. 그 유니콘 뿔과 같은 것이 위에서 언급한 행복입니다. 이러면 좋겠네, 저러면 좋겠네, 할 때 우리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행복을 그려놓고 군침을 흘리는 것입니다. 유니콘 뿔처럼 상상과 환상에서만 존재하는 것. 다른 말로 아주 비현실적인 것이지요.
우리가 행복을 이야기할 때면 흔히 저지르는 오류입니다. 현실에서 비현실로의 비약. 그 격차로 인해 다시 불행감을 느끼기. 그러니 도대체 왜 행복을 추구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 수 있지요. 사람이 왜 행복해지려고 해야 하나요? 상상과 환상으로 도피하는 삶이 어떤 만족을 줄 수 있을까요? 꿈속에서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듯이 유니콘의 뿔이 아무리 생생해도 결국 내 삶에 만족을 주지는 않을 테지요.
행복에 대한 이야기들은 대개 이런 문장입니다. '이런저런 것을 하면 행복할 거야.' 기본 전제가 이러니 행복을 충족시켜 줄 조건에 해당하는 이런저런 것들을 가지려고 합니다. 앞서 말한 돈, 성공, 인기, 인정, 사랑, 건강, 자연, 웃음, 자기의지 등등. 그것들을 구비하면 행복을 구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정말 그런가요? 행복은 어떤 조건에 따른 결과물이 맞나요?
우리는 너무 똑똑한 나머지 또 오류를 저지르고 맙니다. 인과관계의 논리성을 좋아하는 우리의 뇌는 행복을 결과에 놓고 나머지 것들을 원인에 놓고 행복 문제를 풀려고 합니다. 언뜻 아주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방식이지요. 이대로 잘 풀면 행복에 도달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나는 드디어 행복의 공식을 발견했어! 이대로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어!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 있습니다. 개 뿔 같은 소리하고 있네. 거대한 착각이지요. 어느 정도는 맞긴 하지만 그 무엇도 완전한 행복을 보장하는 조건은 없습니다. 조건은 말 그대로 조건이라서 조건이 허물어지면 무너지는 행복감이라면 애초부터 설계가 잘못된 것일 수 있지요. 우리는 설계를 다시 해야 합니다. 행복이 침해받지 않도록. 어떤 경우에도 행복할 수 있도록 생각을 다르게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행복을 원인에 놓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조건들을 결괏값에 놓습니다. 행복이 원인이 되어 나머지 조건들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나요? 원인과 결과를 뒤바꾸어 놓았을 뿐인데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일단 조건을 구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듭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노력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먼저 행복하고 나서 나머지 조건을 추구하는 것. 먼저 행복하기 위해서 지불해야 할 무엇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 어때요? 괜찮지 않나요?
행복이 원인이 돼서 나머지 조건이 결과로 따라온다면 결국 다시 행복해질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의 조건을 가지게 되는 셈이니까요. 이런 논리로 보자면 행복을 먼저 어떻게든 일단 가지면 더욱더 행복해지기가 쉬운 것이지요. 그러면 의문이 들 수 있겠지요. 먼저 어떻게든 일단 그냥 무조건 행복한 건 어떤 것인가?
저는 그것을 '비교의 상실'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내용도 말장난 같고 이해가 안 됐을 수도 있지만 지금부터는 난이도가 더 올라갑니다. 좀 많이 올라갑니다. 정말로 눈을 부릅 뜨고 이해해야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어떻게든 일단 그냥 무조건 행복한, 비교의 상실. 그건 말 그대로 비교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비교하지 않되 남과 나를 비교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내 감정도 비교하지 않는 것입니다. 슬픔과 기쁨을 비교하지 않는 것입니다. 슬픔이 있기에 기쁨이 있습니다. 슬픔은 열등하고 부정적인 것이라서 기쁨으로 바꿔야 하는 감정이 아닙니다. 슬픔은 그냥 슬픔이고, 기쁨의 상대적인 짝으로 슬픔이라 잠시 불릴 뿐입니다. 그래서 기쁨은 슬픔의 무더기 위에 피는 한 송이 꽃과 같은 것입니다. 슬픔 자체는 슬프지 않습니다. 우리가 슬픔을 기쁨의 반대편으로 대할 때 그것은 정말로 슬퍼집니다. 달리 말해 슬픔은 슬픔 그 자체로 귀합니다.
비교의 상실은 그런 것입니다. 상대편의 부산물로 존재하는 무엇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그것으로 보는 것. 슬픔이든 분노든 어떤 부정적 감정이든 긍정적 감정이 달성되지 못한 상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름하여 부정적인' 그 상태 자체로 보는 것. 슬픔 없이 기쁨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아는 것이 비교의 상실입니다. 행복도 불행의 토대에서만 행복이 성립할 수 있다는 안목을 갖추는 것이 비교의 상실입니다. 이렇게 큰 그림을 볼 줄 알 때 우리는 비교를 절로 상실하고, 먼저 어떻게든 일단 그냥 무조건 행복한 것이 무엇인지 체험하게 됩니다.
이런 말들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된다면 우리는 진심으로 그 대표님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왜 행복해야 하나요?
행복하지 말고 불행하지도 마세요.
행복은 행복이고
불행은 불행이에요.
인생에 '행복해야 한다.'라는 법칙은 없습니다. 희한한 점은 '행복해야 하는데. 행복해야 하는데.' 하면 지금 행복하지 않은 것이 앞으로도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입니다. 행복은 행복대로, 불행은 불행대로 그 나름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행복으로 치장된 행복, 불행으로 둔갑한 불행을 치우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내 존재도 바로 그것을 원하지 않나요?
왜 행복해야 합니까?
행복하지 않아도 소중한 인생입니다. 행복하지 않을 때에는 행복하지 마세요. 행복해야 한다고 강박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행복해질 확률이 높아집니다.
강요할 수 있는 삶은 없습니다.
강요할 수 있는 행복도 없습니다.
지금 행복하지 않다면 그것도 소중한 인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