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없는 삶. 어깨를 키울 수 없다면 옷을 바꿔야지.
안녕하세요 재원 씨.
잘 지내셨나요? 재원 씨를 떠올리면 특이하게도 뒷모습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상담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상담실 문으로 가는 그 짧은 동선에서 보였던 뒷모습. 몸집보다 큰 코트가 양 어깨 옆으로 흘러내려 걸음마다 흔들거렸습니다. 어깨에 맞지 않는 코트가 기운이 빠진 듯 축 쳐져 보였습니다. 요새는 어깨에 맞는 옷을 입고 다니시는지 혹은 어깨가 더 넓어졌는지 궁금합니다.
이 편지는 재원 씨에게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재원 씨에게 쓰려고 합니다. 재원 씨와의 상담은 단 한 번의 만남에 그쳤으니까요. 그 한 번의 만남마저도 불발탄 같이 불현듯 끊겼으니까요. 여기에 흔히 말하는 돌직구 같은 이야기가 좀 섞일 듯합니다. 이미 떠난 재원 씨에게 돌직구를 던질 수도 없고 설령 정직한 직구를 던진다고 해도 재원 씨가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재원 씨에게 이야기를 전하려 합니다. 직구지만 최대한 돌은 빼고, 부드러운 직선 같은 이야기를 담담하게 늘어놓으려 합니다.
인생은 누구의 것인가. 내가 살지 않는 삶은 누가 살아주나. 재원 씨가 박차고 나간 뒤 회색 문을 바라보며 생각했습니다. 문득 끊긴 이야기. 별안간 퇴장한 주인공. 일 회 만에 미수에 그친 상담. 갑자기 정전이 일어나 막을 내린 연극을 보듯 잠시 자리를 지키고 사라진 것들을 바라봤습니다. 탁자 위의 찻잔은 아직 식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유복하게 자라서 아무것도 스스로 쟁취할 필요가 없었던 주인공은 정전이 되자 무대에서 가장 먼저 빠져나갔습니다. 깜깜한 무대가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모든 야단법석을 피해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사실 정전을 일으킨 범인은 주인공이었습니다. 재원 씨가 나간 뒤에 정적의 막막함 속에 잠시 머물러 있었습니다. 재원 씨가 앞으로도 회사에서 지금처럼 처신하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재원 씨가 살아온 방식이었지요.
재원 씨의 삶. 어려서부터 모든 것을 부모님이 챙겨 주었다고 하셨지요. 입사 과정에서도 사회 유력인사들과 친분이 두터운 부모님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회사에서 다소 무리한 일을 요구 받을 때에는 부모가 회사에 전화해서 대신 불만을 전달했다는 것은 사내에 이미 널리 알려진 상태였습니다. 심리상담에 와서도 자기 대신 요구사항을 회사에 전달해 달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지요. 다른 말들은 혼자 중얼대는 듯 알아듣기 힘들게 말했어도 그 말만큼은 아주 또렷하게 발음하셨습니다. 상담자가 시원하게 그리 해주겠다는 말을 하지 않자 벌떡 일어나 퇴장하셨던 건 재원 씨다운 모습이었습니다. 재원 씨만의 삶의 방식을 지킨 것이라 생각합니다.
복지의 일환이라고는 하나 회사에서 반강제적으로 실시한 심리상담이었으니 애초에 상담은 재원 씨의 것이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상담에 대해 아무 책임이 없으니 불평불만과 요구만 실컷 늘어놓을 수도 있었겠지요. 상담 자체에 관심이 없었던 것도 이해가 됩니다. 현실적으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상담을 박차고 나간 것도 재원 씨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었겠다고 생각이 듭니다.
정해진 시간을 다 채우지도 못하고 급작스럽게 끝난 상담. 그 남은 시간에 우리가 나눈 이야기가 차와 함께 식어 갔습니다. 그 시간 동안 인생이 어떤 것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원한다면 모든 고통을 피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설령 그게 가능하더라도 고통 없는 삶은 과연 괜찮은 삶일까. 내가 선택하는 것만 누리는 삶이 가능할까.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이라면 무조건 내 몫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이리저리 궁리를 해봐도 속 시원하게 요령 있는 답을 구할 수는 없습니다. 큰 질문을 던질 때면 인생은 요령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재원 씨의 뒷모습이 남긴 메시지를 곱씹으며 나름의 생각을 정리해보았습니다.
내 마음에 들건 마음에 들지 않건 어떤 경우든 내 인생이 마냥 식어가게 둘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단맛만 취하고 나머지는 모른 체하다가는 다 식은 찻잔에 쓴맛만 남은 차처럼 내 인생에도 씁쓸함만 남을지 모릅니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이라도 내 것으로 주어지면 마지막까지 내 정성을 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삶입니다. 태어나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어도, 태어나서 자랄 환경을 내가 선택하지 않았어도 나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다른 삶에 대한 선택권은 완전히 배제된 채 시작하는 삶. 원하지 않아도 삶이 주어졌듯이 원치 않는 고통도 겪을 수밖에 없는 삶. 불합리해 보여도 삶은 원래 그런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권은 어떤 고통을 선택할 것인가, 그 고통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뿐입니다.
재원 씨가 상담을 마친 이후로 사내 상담실에 가만히 앉아 있는 저에게도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당장이라도 퇴사할 것 같았던 재원 씨가 –여전히 시니컬하고 불평불만을 쏟아내고 빈정대기는 하지만- 꿋꿋이 회사를 다니고 있는 것이 신기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더군요. 알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주위 동료들이 재원 씨를 싫어하면서도 미우나 고우나 지금의 재원 씨를 조금씩은 응원하고 있다는 것을. 고통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야 다들 똑같겠지요. 자기들 마음속에도 다들 재원 씨 같은 마음이 있다는 것을 보는 모양입니다. 그럼에도 버젓이 살아내고 있는 자기 자신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다들 재원 씨를 응원하나 봅니다.
저도 마음 깊이 응원을 담아 드립니다. 재원 씨가 택한 삶의 방식과는 별도로 재원 씨가 ‘그래도 살아가고 있는’ 삶을 응원합니다.
▼ 재원 씨와의 상담 사례는 아래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