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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상담사의 아침편지] 나는 아무 죄가 없어요.

by 나무둘

나는 아무 죄가 없어요.

간판이 말했습니다.


어제 간판 공사를 했습니다.

독립서점이자 심리상담센터인 이 공간.

'마르타의서재'가 '마음독립서점'으로 새로운 옷을 입는 날이었습니다.


책방지기와 함께 며칠을 고민한 간판 시안.

이 디자인, 저 디자인, 이 문구, 저 문구를 숱하게 머릿속에서 굴렸는데

어제 드디어 실물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뭔가.

내가 생각했던 산뜻하고 화사한 느낌의 간판은 어디 가고

약간은 진지하고 무게감있는 듯한 느낌의 간판이 도착했습니다.


내가 생각한 그것이 아닌데.

그렇게 여러 차례 조율을 했는데도 이것이라니.

이것도 나름대로 보다 보면 정이 들겠지만 지금은 영 마뜩찮습니다.

속에서 화가 올라옵니다.

도대체 얼마나 더 이야기를 해야 우리의 의견이 일치할 것인가.

척하면 척하고 통하는 그런 사이가 되면 참 좋겠다.

마음 한편에서는 울고 싶은 심정이 됩니다.


어쨌든 이미 설치된 간판.

그 간판을 보면서 화가 오르락내리락하는 내 마음도 보았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이게 화날 일인가 싶어 화난 감정에 대해서

오르락내리락하는 마음의 태도도 보았어요.


그러고 나서 저녁에 성당에 갔습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참으로 오랜만에 성당에 간 날이었습니다.

어제는 천주교 달력에 의하면, 원죄 없이 잉태하신 동정 성모마리아 대축일.

아 죄가 없다라.


원래 전통적으로 많은 종교에서는 죄를 고백하고 사하고 죄에서 해방시켜주는 의식을 행합니다.

교회나 성당에서도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의식이지요.

그런데 어제 미사 중 강론에서 '죄가 없다, 죄인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듣고 있자니

묘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지요.


나는 왜 저 간판이 잘못되었다고, 죄가 있다고 생각할까?

나와 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다고, 왜 그가 죄를 졌다고 생각할까?

화에 오락가락하는 나 자신을 왜 잘못되었다고,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할까?


종교적인 교리는 차치하고 생각해봅니다.

과연 처음 세상에 태어난 아기가 죄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모르고 세상에 태어난 아기의 첫 울음.

그것은 죄의 시작일까요?


백 번 천 번 생각해도 그건 아니지요.

우리는 모두 아무 죄 없이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아무 죄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죄가 있다면 그건 이런 것일 테지요.

지금 있는 그대로의 그것을 아니라고 부정할 때.

나타나 있는 현상과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지 못할 때.

죄 없던 곳에 죄가 생깁니다.


죄는 판단하고 옳고 그름을 따짐으로써 시작된 것입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있는 것.

판단 이전에 '이미 있기' 때문에 아무 죄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책방지기에 대해서도 저의 생각을 다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간판에 대해서도요.


무슨 죄가 있을까요?

설령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떤 면에서는 눈에 띄어야 하는 간판 본연의 효과를 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죄가 있다 없다 할 수는 없지요.


내가 죄가 없길 바란다면

내가 죄인 취급받지 않길 원한다면

세상 사물과 주위 사람에게도 판단의 잣대를 내려놓아야겠지요.

내려놓는다는 것도 사실 어불성설입니다.

판단 자체가 불가능한 것들을 우리는 판단하면서 죄를 만들어내고 있으니까요.


어제의 간판과 요동쳤던 마음에서

새삼 '죄 없음'을 배웠습니다.


오늘 아침 다시 생각합니다.

나는 아무 죄가 없는가?

정말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내 존재 자체로 아무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만약 내가 그것을 원한다면 세상에도 사람에게도 그런 시선을 돌려줄 수 있을까?


아침입니다.

오늘도 해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떴습니다.

세상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도 죄가 있다 없다 따지지 않고 해가 떴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

이 시선으로 당신에게도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어떤 죄를 짊어지고 사나요?

그 죄는 정말 죄인가요?

아무 죄가 없다고 스스로 인정해 준다면 그때 나는 어떤 느낌일까요?


우리 모두

자기 자신에게도 세상 모두에게도

처음부터 아무 죄를 만들어 내지 않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더없이 자유롭게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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