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름이 된 기억들

비우지 않아서 함께 살아냈다.

by 나무둘

언제부터였을까.

잊고 싶은 일들을 꾹꾹 눌러 담기 시작했다.

투명한 병 속에 가득 채운 슬픔과 분노 그리고 어쩌지 못한 미련들.

누군가는 '비워야 가볍다'라고 조언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을 따라 하지 못했다.

마치 내 안에 쌓인 무거운 기억들마저도 나의 일부인 것처럼 조심스럽게 끌어안고 살아왔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깨달았다.

억지로 버린다고 해서 사라지는 감정은 없다는 것을.

지워진 듯 보이는 날에도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묵직한 그림자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그림자들이 내 삶을 뒤흔드는 대신

가만히 내 곁을 지키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다치고 또 애써 살아낸다.

그 과정에서 얻게 되는 건 상처뿐만이 아니다.


상처를 견디며 자라난 작은 힘.

꺾인 줄 알았던 마음이 다시금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는 기적.

그 모든 것이 고스란히 나라는 사람을 만든다.


가끔은 지난날을 돌아보며 웃을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참 힘들었지만 덕분에 여기까지 왔구나."

지금의 나는 울퉁불퉁했던 길을 묵묵히 걸어온 그날들의 연장선에 서 있다.

모난 기억들도, 아픈 순간들도, 다만 나를 키우기 위한 거름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조용히 믿을 수 있다.


삶이란

그렇게 수많은 기억들을 정성껏 거름 삼아

조금씩 조금씩 피어내는 일인지 모른다.


꽃은 쉽게 피지 않는다.

그러나 거름이 되어준 기억들 덕분에

언젠가 우리는 스스로에게 가장 아름다운 꽃이 될 것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오늘 조금 더 따뜻한 마음으로

지나온 시간들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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