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든 게 눈부신 들꽃처럼 피어나길
[내담자가 상담자에게 보내는 편지]
안녕하세요.
요즘 문득 제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게 되는 날들이 잦아졌습니다.
가만히 들춰보면 잊었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여전히 제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억울했던 순간, 분노했던 기억, 미처 흘려보내지 못한 슬픔과 오래된 애증이 먼지 쌓인 재고품처럼 구석구석 쌓여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잊어야 한다고, 훌훌 털어버려야 한다고. 그런데 저는 잘 안 됩니다. 억지로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그 기억들이 더 선명하게 떠오르고, 마음이 점점 무거워지는 걸 느낍니다. 이젠 그냥 인정하려고 합니다. 아 나는 아직 이걸 다 품고 있구나, 하고. 아직은 멀리서 웃으며 바라보는 것도 쉽지 않지만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겠지요?
최근에는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그 시간들이 나를 부서지게만 한 게 아니라 사실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고 있었다고. 그 사람들의 이름은 희미해질지 몰라도, 그곳에서 울고 웃으며 버텨낸 제 시간과 힘은 여전히 제 안에 남아 있다는 걸요.
상담자님, 저는 아직 서툴지만 제 마음의 재고품들을 억지로 치우지 않고 조금은 소중히 다뤄보려 합니다. 언젠가 이것들이 거름이 되어 저를 더 깊게 키워줄 거라는 믿음을 조심스럽게 품고요. 지금은 그냥 이 모든 걸 안고 살아가도 괜찮다고,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해주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혹시 저처럼 아직 품고 있는 것들로 무겁고 서툰 사람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실까요? 마음의 무게를 조금 덜어내는 법이 있다면, 아니면 이 무게와 함께 조심히 걸어가는 방법이라도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상담자가 내담자에게 보내는 답장]
편지를 한 줄 한 줄 읽으면서 당신의 진솔한 마음이 제게 깊이 와닿았습니다.
버리지 못한 기억들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당신의 모습에서 저는 서투름이 아닌 깊은 용기를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픔을 피하거나 외면하려 하는데 당신은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잖아요.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아시나요?
사람들은 쉽게 "잊어버려", "털어내" 라고 말하죠. 하지만 저는 오랜 시간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깨달았어요. 진짜 치유는 망각에서 오는 게 아니라 그 아픔을 천천히 받아들이고 품어가는 데서 온다는 걸요. 당신이 기억을 조심스럽게 품고 멀리서 바라보려 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건강한 방식이에요.
갇힌 기억도 언젠가는 거름이 됩니다. 맞아요. 상담실에서 만난 수많은 분들이 똑같은 길을 걸어왔거든요. 처음엔 모두 날카롭고 아픈 기억들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들이 그 사람만의 깊이와 따뜻함으로 바뀌는 걸 저는 수없이 많이 보고 있답니다.
지금 당신이 느끼는 날 것 같은 감정들도 마찬가지예요. 지금은 아리고 쓰라리지만 시간이 천천히 그것들을 부드럽게 다듬어줄 거예요. 급할 것 없어요. 마음이 준비될 때까지 천천히 가도 되는 거예요.
매일매일 살아내는 것 자체에도 때로는 큰 용기가 필요해요. 누구나 그런 경험이 한 번쯤은 있지요. 아침에 눈 뜨는 것부터 시작해서 하루를 버텨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요. 그러니까 너무 스스로를 재촉하지 마세요. 가끔은 무거운 마음을 그냥 안고 앉아 있어도 괜찮아요. 누구든 그런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저도 힘들 때면 그냥 가만히 앉아서 제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요. 그게 나쁜 게 아니라 필요한 시간이라는 걸 이제는 알거든요.
오늘 하루도 버텨낸 당신을 아무 조건 없이 다정하게 안아주세요. 거울 앞에 서서 "오늘도 고생했어, 잘했어"라고 말해주세요. 누군가 해주길 기다리지 말고 당신 스스로에게 먼저 그 말을 해주세요.
삶이란 정말 울퉁불퉁하고 어지러운 기억들을 천천히 갈아엎어 눈부신 꽃을 피우는 기다림인 것 같아요. 언젠가 그 모든 기억들이 정말로 눈부신 들꽃처럼 피어날 때, 그때 당신이 "아 그때 그 아픔도 의미가 있었구나" 하고 미소 지을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의 여정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존중합니다. 언제든 힘들면 여기로 오세요. 마음의 짐을 함께 들어주지는 못하지만 마음의 이야기를 함께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여기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