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 내어 말해주세요.
[내담자가 상담자에게 보내는 편지]
안녕하세요.
오늘은 조심스레 제 안의 말을 꺼내어 보려 합니다. 그동안 너무 오랫동안 말 대신 침묵을 선택해 왔던 것 같습니다. 누구보다도 화가 났지만 화내지 않았고, 억울했지만 설명하지 않았고, 슬펐지만 울지 않았습니다. 그냥 참았습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제가 참아야 할 것 같았고, 그래야 관계가 유지될 것 같았어요.
사람들은 절 착하다고 했습니다. 속이 깊다고도요. 하지만 그 말들이 따뜻하게 다가오기보다는 어딘가 공허하게 들렸습니다. 그들은 제 속을 몰랐으니까요. 제가 얼마나 숨죽이고 있었는지, 어떤 말들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삼켜졌는지. 참는다는 건 때로 성숙일지 몰라도 저에겐 그저 외로움이었습니다. 나조차 나를 외면하는 기분이었어요.
얼마 전 상담 중에 제가 울었던 건 아마도 너무 오래 쌓여서였을 겁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는데 그날만큼은 도저히 더 버틸 수 없었습니다. "답답해서 미칠 것 같다"는 말이 그냥 튀어나왔어요. 그건 진심이었고 그만큼 절박했던 겁니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참아야 하나. 내가 왜 나 자신을 이렇게까지 지워야 하나. '좋은 사람'이라는 껍데기 뒤에 가려진 제 마음은 너무도 생생하고 아팠습니다.
이제는 그 자리를 다시 바라보고 싶습니다. ‘참는 사람’의 자리가 더 이상 저를 갉아먹는 곳이 아니라 저를 회복시키는 자리이길 바랍니다. 여전히 조심스럽고 여전히 망설이지만… 이제는 제 감정도 꺼내어 말할 자격이 있다고 믿어보려 합니다.
제 감정이 틀리지 않았다고 그 감정에도 말할 차례가 왔다고, 그렇게 말해주신 그날. 너무 감사합니다. 이 말이 작지만 제 첫 번째 목소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상담자가 내담자에게 보내는 편지]
조용히 살아낸 당신의 하루하루를 떠올려 봅니다.
아무 말 없이 참아왔던 시간들이 사실은 얼마나 뜨거운 감정을 품고 있었는지 당신의 눈물은 너무도 분명하게 말해주었지요. 그 울음은 나약함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오래 강해지려 애썼던 사람의 마지막 용기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동안 당신이 얼마나 혼자였을지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져요. 화가 나도 화내지 않고, 억울해도 설명하지 않고, 슬퍼도 울지 않으며 살아온 날들. 그 하루하루가 얼마나 무거웠을지... 아무도 그걸 강요하지 않았다고 하셨지만 사실은 세상이 은밀하게 강요해 온 것들이 있지 않았나 싶어요. '좋은 사람은 참아야 한다'는, '성숙한 사람은 불평하지 않는다'는 그런 무언의 압력 말이에요.
사람들이 당신을 착하다고, 속이 깊다고 했다는 얘기를 들으니 씁쓸했습니다. 그 말들이 당신에겐 위로가 아니라 또 다른 짐이 되었을 것 같아서요. '착한 사람'이라는 틀 안에 자신을 가둬두어야 한다는 부담감 말이에요.
상담 중에 당신이 우셨을 때 저는 오히려 안도했습니다. '드디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드디어 당신이 당신의 마음을 만나는구나, 드디어 그 오랜 침묵의 벽에 균열이 생기는구나 하고요. "답답해서 미칠 것 같다"고 하셨을 때 그게 얼마나 정직한 말인지 아시나요? 그 한 마디에 당신의 진짜 모습이 다 담겨 있었어요.
당신이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들이 참 중요한 것 같아요. "내가 왜 이렇게까지 참아야 하나. 내가 왜 나 자신을 이렇게까지 지워야 하나."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변화의 시작이에요. 자기 삶을 돌아볼 용기를 낸 거니까요.
지금까지 당신은 '참는 것'을 통해 관계를 지켜왔다고 생각하셨겠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관계, 자기 자신과의 관계는 소홀히 해왔던 것 같아요. 이제는 그 관계도 돌봐주셨으면 해요. 당신의 감정도 당신의 목소리도 소중하니까요.
'참는 사람'의 자리를 회복의 자리로 바꾸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 마음이 참 아름답습니다. 상처를 딛고 일어서려는 의지가 느껴져요. 그 길이 쉽지만은 않겠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걸 기억해 주세요.
당신의 첫 번째 목소리를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제 시작이에요. 천천히 조금씩 당신만의 속도로 가시면 돼요.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