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시대에는 프로방스 백작의 영지였고, 전쟁과 수탈을 피해성벽을 쌓고 미로처럼 좁은 골목길에 돌집을 지어 살았던 요새마을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낡고 불편했던 마을이 2차 세계대전을 거치고 예술가들이 찾아와서 살게 되면서 예술가 마을이 되었다.
샤갈의 그림속 생폴드방스
마르크 샤갈(1887~1985)도 63세부터 97세로 삶을 마감할 때까지 생폴드방스에 살았고 그의 무덤도 이곳에 있다. 그래서 샤갈의 마을이라고도 부른다. 샤갈은 벨라루스 유대인 출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러시아, 파리, 미국을 떠돌다가 생폴드방스에 정착하면서 지중해의 빛과 자연 속에서 영감을 받아 좋은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니스역에서 아침 일찍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고 생폴드방스로 갔다.
기차역 슈어메르(Cagnes-sur-Mer)에서 내리면 바로 교각아래 655번 버스 정류장이 있는데 이곳에서 버스를 타고 생폴드방스까지 가면 된다. 겨울이어서 그런지 일요일인데도 사람이 별로 없었다. 마을을 지나고 꼬불꼬불 올라가기도 하며 버스를 타고 가는 25분가량은 즐겁다.
마을 사람들이 버스를 타고 내리는 모습, 마을을 지날 때마다 조금씩 다른 풍경,버스에서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정류장 안내방송의 프랑스어가 그렇게 감미로울 수 없었다. 특히, R 발음을 할 때의 프랑스어는 사랑을 속삭이는 듯했다.
655번 버스에서 내려 상점들이 있는 곳을 지나서 조금 들어가면 마을입구에 표지판이 나온다.
지도를 보고 있는데 개와 함께 산책을 하고 나오는 동양인 여성과 마주쳤다. 한국사람이라고 느꼈다.
운동복차림이지만 뭔가 세련되고 차분한 것이 딱 우리나라 사람 같았다.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니 "안녕하세요"하며 받아준다. 역시...
약간 망설이면서(말을 많이 하거나 아는척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타입인 듯) 일찍 잘 오셨다고 이따 오후가 되면 사람이 많아진다고 한다. 마을이 아름다우니 천천히 둘러보시라고, 들어가자마자 왼쪽에 있는 카페가 일찍 문을 열었다고 하며 그 집 커피가 맛있다고 알려준다. 그리고 담백하게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길을 갔다. 그런데 여운이 남았다. 이 마을에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미니멀한 이미지에 알 수 없는 쓸쓸함이 느껴졌다.
사람이 행복을 느끼는 것 중에 하나가우연한 친절과 마주했을 때라고 한다. 친절은 과장된 몸짓이나 많은 정보, 헌신이 아니고 필요한 정보만 알려주는 담백한 것이 아닐까. 이날의 낯선 이와의 짧은 만남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10시도 되지 않은 아침시간이라 문을 연 카페는 이곳 한 곳뿐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그윽한 커피냄새가 나는 따뜻한 공간이다.혼자 와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고 창밖을 보며 천천히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커피와 달달한 간식을 먹으며 창밖 풍경을 보고 있었다.
창밖으로 가족인듯한 사람들 몇 명이 카페 앞을 고민하듯 오고 가더니 잠시 후 카페로 들어온다. 표정이 없고 몸집은 왜소하고 굉장히 중립적인 색깔의 옷을 입은 노부부와 중년의 아들, 청소년기 아이들 여행을 왔으면 즐거울 텐데 그들의 표정은 이별여행을 온 사람들 같았다. 하지만 이별여행을 오기에 남프랑스는.... 나의 편견일 수도 있다.
대화소리가 언뜻 들리는데 일본인이었다.나오면서 같은 동양인이라는 동질감이 발동해 영어로 즐거운 여행되시라고 했더니 그도 인사를 건넨다. 그 후 작은 마을이라 이 가족들을 종종 마주쳤다. 내 기억에 이들이 남아있는 이유는 여행을 떠나온 이들이 당연히 누려야 하는 설렘 같은 긍정적인 감정이 전혀 없는 그들의 모습 때문이다.
그들이 모두 행복하지만 표현을 잘 못하는 사람들이기를 바란다.
흐린 아침이라 골목은 더더욱 중세시대처럼 느껴진다. 간간이 불 켜진 상점이 있고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보인다.
걸어가는 돌바닥에도 정성이 가득하다.판화를 떠도 아름다운 패턴이 될 것 같은 거리다.
작품을 판매하는 전시장, 유리공예, 조각, 회화 다양한 예술작품을 한곳에서 볼 수 있었다. 어딘가 텅 빈 현대인을 상징하는 것일까... 갤러리 주인장은 우리에게 안내가 필요한지 물었고 우리는 그냥 구경만 할 거라고 하니 쿨하게 자신의 일을 계속했다.
오래된 것들은 세월을 지나오면서 갖게 된 아름다움을 저마다 품고 있다.
마을에 사는 예술가들의 그림을 팔고 전시하는 공간이 곳곳에 있다. 돌벽으로 이루어진 오래된 건물도 또 하나의 작품이다.
앞만 보고 걸어가고 있는데맞은편에서 마을 주민인듯한 나이 지긋한 분이 걸어오면서 왼쪽 방향을 보라고 손동작을 하신다. 처음에는 못 알아들어서 우리가 그분에게 다가가려고 하자 적극적인 몸짓으로 알려주신다. 그분이 보라고 한 곳에 이런 작품이 있었다. 와.... 하면서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려주지 않았으면 그냥 지나칠뻔했다. 흡족한 얼굴로 천천히 지나가는 그분의 모습이 정겹고 따뜻했다.
골목으로 아침 햇살이 서서히 비치고 있다.
골목 끝 한 사람의 모습이 사진 속에 담겼다. 잡지 표지모델 같은 그의 모습은 조커가 부유한 환경이었다면 이런 분위기였을까...뭐 이런 생각을 하게 한다.
지중해가 보이는 마을 끝 성벽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니 이 마을에 살았던 영혼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 보인다. 그중에 샤갈의 무덤도 있다. 죽은 자들의 공간에 비치는 아침햇살은 더 따뜻하고 더 평화로웠다.
무덤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묘지 배치도가 돌 표지판에 그려져 있다.
샤갈의 무덤은 소박했다. 그의 무덤에 올려져 있는 자갈은 유대교의 전통에 따른 추모의 의미라고 한다.
특이하게도 샤갈은 그의 세 번째 부인인 바바와 그녀의 동생 미셀 브로드스키와 같이 잠들어 있다. 샤갈은 세명의 부인이 있었다. 가장 사랑했던 첫 번째 아내 벨라는 1944년 감염병으로 사망하고, 두 번째 부인 버지니아는 7년을 살았지만 늘 벨라를 그리워하는 샤갈을 견디지 못해 어린 아들을 데리고 떠났다. 세 번째 부인 바바는 벨라를 그리워하는 샤갈을 인정해 주고 그의 예술세계를 응원해 주는 강력한 후원자로 샤갈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함께 했다. 누군가 나를 믿어주고 응원해 주는 것의 힘은 위대하다.
어머니가 살아 있는 한, 나는-어머니의 해피엔드인 나는- 절대로 손상 될 수 없는 존재이다.
- 로맹가리 "새벽의 약속"
샤갈의 그림에는 벨라가 늘 아름답고 행복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생폴드방스는 프랑스의 중요한 국경 거점이었다. 프란시스 1세의 명령에 따라 건설한 튼튼한 성벽은 건설 이후 그대로 남아있어서 요새 마을임을 느끼게 한다. 이 문들을 지나면 어디선가 중세 기사가 창을 들고 튀어나올 것 같다.
성벽을 따라 걷는다. 마을 안쪽의 집들과 거리가 보이고 바깥쪽으로는 멀리 지중해도 보이고 눈 덮인 알프스산도 보인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에 참전하여 사망한 이 마을 젊은이들을 기리는 석조물이다.
우리가 여행한 프랑스의 대부분 지역에는 이렇게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사망한 그 마을 젊은이들을 기리는 석조물이 있었다. 피할 수는 없지만 잊지는 말아야 하는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자 하는 노력이리라. 가만히 서서 이름과 나이를 보는데 먹먹해졌다. 전쟁이 앗아간 이들의 삶은 이 석조물에 슬프게 남아 있다.
성벽에서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내려와서 골목을 걷다 만난 페니탕 블랑(Pénitents Blancs) 예배당.
13세기에 건축한 성당은 근대에 이르러 벨기에 출신의 예술가 폴롱이 성당 내부를 대대적으로 개조하고완성했다고 하여 그의 이름을 따 폴롱 예배당(Folon Chapel)이라고도 현지인들은 부른다. 이 예배당의 장식은 2005년에 사망한 폴롱의 마지막 창작물이다.
생폴드방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성의 지하실은 18세기말부터 시청으로 사용하고 있다.
생폴드방스 마을 입구에 있던 생트클레르 예배당.
문이 닫혀 있었는데 작은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재정여건이 좋지 않아 문을 닫으며 이 예배당을 살리기 위해 후원을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이 예배당의 옆길로 해서 언덕을 올라가면 샤갈의 그림과 생폴드방스의 전체모습을 볼 수 있는데 우리는 다른 길로 가서 보지 못했다.
매그 미술관으로 가는 길에 옆을 보니 생폴드방스가 보인다. 샤갈의 그림 속에, 생폴드방스 관광안내 책자에 나오는 사진 같은 모습이다.
매그재단 홈페이지 사진
1964년에 설립된 매그 재단 미술관(La FONDATION MAEGHT)은 예술품 수집가인 매그 부부가 자신들의 이름을 따서 만든 현대 미술관이다.
프랑스 최초의 독립 예술 재단으로 카탈로니아 건축가 Josep Lluís Sert와 협력하여 이 재단을 건축했다. 호안 미로, 샤갈, 자코메티 등 현대 예술가들과 특별한 우정을 가지고 있던 매그 부부는 그들의 작품과 신진 작가들의 작품 7,00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매그 미술관은 생폴드방스 마을을 바라보며 방과 정원이 가장 완벽한 조화로 상호 작용하는 이상적인 곳이며, 자연 속의 박물관으로서 20세기와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유럽 작품 컬렉션을 모아 놓은 곳 중 하나이다.
현대적인 작품들이 많았다.
샤갈의 '인생'
샤갈이 말년에 그린 작품으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그린 그림이다. 첫부인 벨라와 마지막 여인 바바에 이르기까지 인생 전반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있다. 왼쪽에 부부와 아이는 샤갈 자신과 평생 사랑했던 첫 번째 부인 벨라와 딸 이다의 모습이다.
미술관 옥상에서 바라보니 멀리 지중해가 보인다.
남프랑스의 가장 따뜻한 언덕 위에 자리한 마을 생폴드방스, 성벽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로 들어갈 것만 같은 마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