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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산책로 에즈(Eze)

겨울에 떠난 남프랑스

by 정안

에즈는 니스에서 기차를 타고 15분 걸리는 곳이다.


기차역 에즈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40분 가는 방법과 등산하듯 한 시간 반 정도를 걸어 올라가야 하는 길이 있다. 걸어 올라갔다. 옛 모습을 잘 간직한 에즈 마을도 아름답지만 걸어 올라가는 한 시간 넘는 길 또한 매력적이었다. 아침이라면 햇살이 반짝이는 드넓은 바다를 저녁이라면 조용히 해가지는 뭉클한 풍경을 보게 될 것이다.


올리브나무와 산중턱에 자리 잡은 집들과 망망하게 펼쳐진 지중해는 우리를 고요한 세계와 만나게 해 주고, 왜 이곳이 니체의 산책로였는지 느끼게 해 준다.


니스빌역의 아침

니스에 있는 3일 동안 기차를 타고 남프랑스 근교 도시를 여행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기차 타기 좋은 니스빌역 근처에 숙소를 정했다. 니스빌역은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다. 그리고 기차표 발권기가 특이하다. 다이얼식... 여러 번 시도했지만 자력으로 발권을 한 번도 못했다. 게다가 휴일 아침에는 창구에 사람이 없는 무인발권 시스템이다.


여러 차례 발권을 시도했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휴일이라 매표소에는 직원도 없었다. 그 와중에 우리의 요청에 흔쾌히 자신을 튀르키예에서 왔다고 소개하며 발권을 도와준 청소하시는 분이 너무도 고마웠다. 겨우 표를 끊고 들어가려는데 이번에는 입구 기계에 표가 인식이 안된다. 우리뿐만 아니라 똑같은 처지의 여행자들이 많았다. 그때 교통카드로 터치해서 우리 모두가 들어갈 수 있도록 해준 여자분이 있어 기차를 타러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친절은 인류를 구할 것이다. 그것이 크던 작던.


남프랑스의 도시들을 이동하는데 기차(TER)는 매력적인 교통수단이다. 편리하고 편안한 것은 물론이고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 기차가 지나가면서 바다 풍경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남프랑스 기차역 명칭에 유난히 "Sur Mer"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는 바닷가 혹은 바다에 *(Sur ~에, Mer 바다)라는 뜻이다.


기차에서 내려 밖으로 나오면 바로 위쪽에 버스 정류장이 있다. "GARE"는 기차역이라는 뜻이다.("SNCF"는 프랑스 국영철도회사이다. 우리나라 코레일처럼) 니체의 산책로 에즈빌까지 1시간 30분 걸린다는 나무 안내판이 돌벽에 걸려있다.


올라가는 길의 시작이다.

12월인데도 돌담을 따라 햇살을 받으며 꽃이 피어있다. 걸어서 가는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올라가는 지점마다 뒤돌아서 보는 지중해의 드넓은 바다와 산중턱과 해안가에 자리한 아름다운 주택들의 모습을 드론을 찍듯 위에서 전경을 내려다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올려다보니 막막한 암석만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데 저 너머에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있다니 신기했다.


내 앞을 가로막는 돌덩이를 만나도 그 뒤에 새잎을 내고 꽃을 피우는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위안이 될 것 같다. 기나긴 인생길에서.


올라오다 돌아보니 떠오른 해와 함께 반짝이는 바다가 보인다. 산중턱에 있는 마을의 집 앞 테라스까지 보인다. 겨울에 영하로 내려가는 일이 없는 남프랑스에서 산중턱에 집을 짓는 일은 폭설로 인한 불편함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중턱쯤 올라가니 니체의 산책로였다는 팻말이 있다. 니체가 이 길을 걸었고 니체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다.


"이 세계는 영원히 반복된다.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운명을 사랑하고 긍정하라.

이 순간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한번 있었고 여러 번 반복되었다"

- 니체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가끔씩 마치 언젠가 겪었던 일인 듯 느껴졌던 게 그래서였나... 영원회귀

걷는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걸음으로 느껴지는 발바닥의 감촉과속의 공기, 물소리에 집중하며 걸었다.


헉헉대고 올라가기를 반복하다 어느 순간 올려다보니 비로소 마을이 보인다.


미켈란젤로에게 조각이란 쓸데없는 부분을 제거하여 돌 속에 갇혀있는 그 형상들을 해방하는 작업이었다는 말이 생각나는 모습이다. 돌에 묻혀 있던 집의 형상을 깎아 만든 듯한 곳이다.


거의 올라왔는데 마을에서 축제를 하는 듯한 소리와 맛있는 냄새가 났다.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고 있는 듯했다. 다 올라오니 조금 허무해졌다. 버스가 다니는 넓은 길이 갑자기 나타났고, 그 길로 많은 사람들이 편안한 얼굴로 걸어오고 있었다. 우리는 더워서 셔츠차림인데 그들은 패딩을 꽁꽁 싸매고 걸어온다.


순간 또 다른 두 세상이 만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겨울에도 아름다운 마을이다.

돌로 쌓은 성을 잘 보존했고 예술가나 공예가들이 살고 있는지 집 앞에 자신들이 만든 작품(제품)들을 전시해 놓고 판매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토요일인데도 상점들 문이 닫혀 있고 몇몇 가게와 레스토랑만이 영업 중이라 조금 의아했다. 여름이었으면 사람에 쓸려다닐뻔, 걸으며 마을의 고즈넉함을 즐기니 겨울여행도 좋은 점이 많다는 생각을 했다.


늦가을 같은 분위기가 나는 남프랑스의 겨울이다.

지난여름의 기억을 간직한 포도나무 덩굴이 건물과 건물사이를 이어주고 있다. 그 그늘아래서 먹고 마시며 즐거워했을 사람들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자연지형을 그대로 두고 지은 건물들, 골목은 많은 보물들을 숨기고 있다. 옛사람들의 삶, 이를 보존하고 지키는 지금 사람들의 손길과 정성, 이곳에서 벌어졌던 분쟁과 희생의 흔적들. 이 한 곳의 장소에서 과거와 현재를 보고 미래를 예측할 수도 있다. 이 성벽 같은 건물과 마을은 앞으로도 이렇게 지속될 것이다. 언제까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영원한 건 없으니까...


에즈의 열대식물원 들어가는 입구에 서 있던 독특한 나무와 유난히 긴 여성의 조각상. 푸른 하늘과 맞닿은 나무는 고개를 힘껏 꺾어 하늘을 올려다보게 한다.


열대식물원 가장 높은 곳에 올라오니 우리가 들어왔던 입구인 시계탑과 수리 중인 성당이 맞닿아 있는 게 보이고 산중턱 곳곳에 또 다른 마을들이 있다. 지중해 바다를 연모하는 마을이 온 산에 가득하다.


먼 곳을 응시하고 꿈꾸는 듯한 얼굴을 한 긴 조각상이 여기에도 있다. 잠시 서서 바라본다. 예술은 생각 없이 내딛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겨울이라 열대 식물원에는 동면에 들어간 듯한 빛깔의 선인장과 햇살에 조심스레 꽃을 피운 다육이, 이름 모를 나무들이 있었다.


여름의 나무와 겨울의 나무 중 누가 아름다운지 우리는 비교하지 않는다. 겨울은 겨울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나름의 빛깔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으므로. 우리도 그렇다. 당신은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고 충분히 멋지고 예쁘다.


햇살아래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을 보며 함께 살아가는 것의 소중함에 대해 생각했다.

예전에 친구들은 서로 만나면 뭔가를 자랑하기 바빴다. 자랑거리를 준비해서 모임에 나온 사람들처럼 열심히 자신이 가진 것들을 자랑하고 비싼 옷과 가방을 가지고 나와 은근히 알아주기를 기다렸다. 그걸 알아주지 않는다고 삐지는 친구도 있었다. 좋은 차를 타고 왔는데, 큰맘 먹고 산 좋은 옷을 입고 나왔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지만 친구들은 이제 변했다. 좋은 옷과 좋은 차는 그저 비싼 옷과 비싼 차였을 뿐이다. 자랑보다는 속상한 이야기, 부족한 이야기를 하며 서로 위로받고 위로한다. 사람과 사람으로 만나는 순간이다. 오랜 세월 살아가면서 깨달은 것이다.


햇살로 극명하게 대비되는 죽은 자의 공간과 산자의 공간.


아랫마을로 내려와서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는 곳으로 갔다.

주민들 스스로 주최하는 행사인 듯 어설프지만 즐거움은 넘쳤다. 참가자 보다 행사를 주최하는 사람들이 더 즐거워 보였다. 노래를 부르고 서로 웃음기 가득한 눈길을 교환하고 축제장은 흥겹고 따뜻했다. 마을주민들이 만든 제품들을 팔고 있었는데 단연 인기 있는 곳은 먹거리였다. 알찬 재료로 가득한 스튜와 빵, 와인을 마시며 빨간 망토에 흰 모자를 쓴 마을 합창단의 노래를 들으니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밀려왔다.


다시 내려가는 길, 마을축제의 여운이 가슴에 남았다.


저렇게 살아갈 수도 있는 거였구나...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고 느리고 천천히 가도 괜찮은 그런 삶.





매주 목요일 연재하는 글입니다.

다음글 "모나코"는 1.25(목)에 발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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