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소소일상 09화

흐린 날 걷는 즐거움

봄날은 간다.

by 정안

아침에 나오니 부슬부슬 봄비가 내리고 있다.


늘 가방에 넣어 다니는 작고 가벼운 우산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갑자기 비가 올 때, 비 오는 걸 모르고 나왔다가 당황할 때 아주 유용하다.


별다방에서 아메리카노를 한잔 사서 출근한다.

출근길에 들려 공원을 산책할 생각을 하면 가는 길이 즐겁다.

뜨거운 커피를 호호 불며 신호가 멈출 때마다 홀짝홀짝 마신다. 커피향기가 마음을 느긋하게 한다.


공원에 도착하니 비가 거의 그쳐있다. 우산과 커피를 챙겨서 아침 산책을 시작한다.

오늘은 공원 한 바퀴를 다 돌기로 결심했다. 햇살이 비치지 않아 걷기에 좋은 날이다.



늘 걷던 길 건너편으로 오니 호수와 풍경이 다르게 보인다.

지는 벚꽃도 피어나는 나뭇잎도 아름답다.



건너편 나무들과 이쪽 나무가 마주 보며 아침 인사를 나눈다.


흐린 날은 걷기에 좋다.

사물들이 차분하게 생각에 잠겨있고, 비를 품은 바람이 불어와 얼굴을 스칠 때의 느낌이 좋다.



나의 세상이 왔다는 듯 즐거운 조팝나무.

화려한 벚꽃의 시절이 지나가고 있지만 아쉬워할 것은 없다. 새로운 꽃이 피어나고 있다.



호수 위 긴 둑이 보인다.

흙냄새를 맡으며 걸을 수 있는 길이다. 한쪽은 드넓은 밭 전망, 또 한쪽은 호수 전망이다.


이 언덕에 서면 흙냄새를 품은 바람이 불기도 하고 물냄새를 품은 바람이 불기도 한다.

긴 언덕길을 보니 생각나는 시 한 편이 있다.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 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그러질 고운 꽃밭 속

처녀 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과 같이

땅에선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 이수복 '봄비'



평야가 주는 평화로움이 있다.

무언가를 심기 위해 정갈하게 정돈해 놓은 밭의 부드러운 흙냄새가 바람을 타고 몰려온다.



언덕길을 걸어가는데 뒤로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덜컹이며 지나가는 기차를 보면 이대로 어디론가 떠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주차장에 와서 차에 타려고 하는데 오래된 나무들이 인사를 건네는듯하다.


아름다움은 영혼을 살찌운다.

몸을 위한 것이 음식이라면 영혼을 위한 것은 인상적이고 복합적이며 기분 좋은 이미지들이다.

- 토마스 무어 ‘영혼의 돌봄’


나는 오늘 한층 건강해진 영혼을 데리고 출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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