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걸으면 만나는 것들
올레 19코스를 걷는 날이다.
함께 걷기를 신청했는데 제주에 같은 시기에 와 있던 직장 동료도 걷기에 합류하기로 했다. 숙소를 마지막으로 옮기는 날이라 '가방을 부탁해' 예약을 하고 짐을 싸서 1층에 놓아두고 버스를 타러 갔다.
일기 예보대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가 오는 날 걷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모두 모여 출발을 했다.
올레 19코스는 조천 만세동산에서 출발해서 신흥리 백사장을 지나 함덕 해수욕장과 해동 포구를 거쳐 동복리 마을 운동장에서 중간 스탬프를 찍고 벌어진 동산과 김녕 농로를 지나 김녕 서포구에서 마무리하는 걷기이다. 총길이 19.4킬로미터로 올레길 중 긴 편에 속한다.
출발하는데 비가 내려 모두 우비를 입었다. 두 분의 길안내 봉사자의 주의사항을 듣고 출발했다. 비는 내리고 바람도 불었지만 우비를 입고 모자를 쓰니 든든했다. 조천 만세동산 앞에서 제주의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라는 설명을 듣고 제주 항일 기념관을 빠르게 관람했다. 작고 힘없던 우리나라 조선이 독립할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전국에서 크고 작은 독립운동을 끊임없이 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삼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가슴 깊이 자랑스러웠다.
농로를 걸어가는데 활짝 핀 유채와 비에 젖은 검은 돌담이 그림처럼 어울렸다. 어느새 키가 커진 유채꽃과 청보리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도 아름다웠다. 제주에 와서 활짝 핀 유채꽃을 가장 많이 본 날이었다. 비 오는 날 걷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을 주었다. 햇살이 없으니 온 얼굴을 드러내고 걸을 수 있어 얼굴에 시원한 바람을 실컷 맞을 수 있었다. 선글라스를 쓰지 않아도 돼서 풍경을 맨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제주의 풍경은 비 오는 날 더욱 그 아름다움을 드러냈다.
신흥리 백사장에 도착했는데 백사장 안쪽까지 물이 들어차 있고 파도가 거세게 쳤다. 잠시 휴식하는 사이 봉사자 중 제주도에서 살아왔던 한분이 척박한 땅 제주에서 살아가기 위해 제주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고통과 아픔을 겪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줬다. 말씀하시는 그분의 눈가가 촉촉해졌고 나도 손수건으로 눈을 닦았다. 거친 자연환경과 참혹한 국가폭력으로 고통받았던 제주도민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먹먹했다.
그러면서 제주인은 울담에서 태어나 밭담에서 일하다가 산담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불어오는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걸었다. 함덕해수욕장 근처에서 점심을 먹으러 갔다. 그 근처 숙소에 머물고 있는 또 다른 직장 동료에게 연락해서 같이 점심 먹고 조금 걷자고 했다. 합류해서 셋이서 점심을 먹었다. 저녁도 약속되어 있었지만 올레길을 걷다 만나니 더 반가웠다.
점심을 먹고 서우봉을 올라가는데 감탄을 자아내는 유채꽃밭이 나타났다. 오르막길의 헉헉거림도 잊고 모두 즐거워했다. 게다가 올라와서 보는 함덕 해수욕장의 비 오는 쪽빛 바다는 신비로운 색을 띠고 있었다. 비 오는 날은 모든 것이 더욱 선명했다. 물기를 머금은 자연은 깊이를 더하며 마음을 끌어당겼다.
서우봉 숲길은 비가 오니 바닥은 푹신하고 촉촉해서 걷기에 좋았다. 습기 찬 가운데 맡아지는 숲의 냄새가 좋았다. 제주 4.3의 아픔이 새겨져 있는 조천 북천마을 4.3길을 거쳐 아기자기한 마을의 정취와 돌담길이 있는 북촌 마을길을 지나왔다. 나중에 제주에 와서 살게 된다면 살고 싶은 마을이었다.
바닷가 길을 걷고 있는데 해안 쓰레기를 치우는 봉사자들이 무거운 밧줄 더미를 끌어올리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걷던 사람 모두가 달려가 줄을 잡고 끌어올렸다. 무겁고 양도 많아서 돌담 위로 쉽게 올라오지 않았다. 두 개조로 나누어서 영차영차하며 잡아당기기를 여러 번 하자 드디어 밧줄이 형체를 드러냈다.
모두 박수를 치며 아이처럼 좋아했다. 고맙다고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하는 말을 들으며 떠나오는데 괜스레 코끝이 찡했다. 이렇게 순수하고 좋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 좋다. 올레길을 걷다가 갑자기 국뽕이 차올랐다.
아름다운 농로길을 지나 큰길로 나왔는데 올레 19코스 마지막 편의점이라는 곳에서 누군가 아이스크림을 모두에게 사줬다. 좋은 일이 있다고 했다. 마침 당보충이 필요한 시간이었는데 고마웠다. 그분에게 더 좋은 일이 생기기를 바랐다.
그다음 들어선 숲길은 매력적이었다. 깊은 숲길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하나의 숲이 끝나서 작은 도로에 나왔다가 다시 숲으로 들어갔다. 숲이 주는 평화와 기분 좋음을 만끽했다. 특히 비가 온 후 숲 속은 촉촉함과 나무 냄새와 새소리, 오후부터 개기 시작한 하늘에서 커다란 나무 사이로 마알간 햇살이 가늘게 비쳐 들어왔다.
누군가 숲에 들어오면 뱀이 나올까 봐 무섭다고 하자 뱀은 5월이나 돼야 나오니 걱정 말라고 했다. 숲길 걷기는 마음을 마알갛게 정화시키고 발걸음을 경쾌하게 했다. 하지만 숲이 깊어 함께 왔으니까 걷는 것이 즐거움으로 가득했지 혼자 왔다면 무서웠을 것 같다. 뒤에 오던 참여자가 올레꾼 초보 시절에 아무것도 모르고 비 오는 날 이 숲에 들어왔었다고 했다. 사람을 만나도 무섭고 안 만나도 무서웠던 기억이 선명하다고 했다.
얼마 전 만난 택시기사님의 이야기 덕분에 나는 곶자왈과 같은 숲에 대한 두려움이 옅어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자연과 대면하라고 한 말씀이 다시 생각났다. 언어가 의식을 변화시켰다. 비 온 후 숲에서의 기나긴 걷기를 마치고 숲만큼 아름다운 농로를 걸어가는데 초록의 널따란 쪽파밭이 나왔다. 그런데 쪽파에 꽃이 피어 있어서 모두 신기해했다. 누군가 꽃이 아니라 씨앗이라고 말했다.
김녕 바다를 지나 올레길 종점인 김녕 서포구에서 걷기를 마무리했다. 비 오는 날 걷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지 느낀 하루였다. 앞으로 비가 온다고 걷기를 멈추지 않으리라. 올레 19코스는 농로와 기나긴 숲길, 바닷길이 있는 아름다운 길이지만 호젓한 숲길이 길어 혼자 걷지 마시고 함께 걷기(아카자봉)를 이용하시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