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마을길과 긴 바당길
숙소를 옮기는 날이라 간단히 아침을 먹고 짐을 챙겨 나왔다.
짐 옮김이 서비스 '가방을 부탁해' 두 번째 이용인데 아주 편리하다. 무거운 가방을 숙소 현관에 두고 주인께 말씀드렸다. 잠깐사이 정이 들었는지 숙소 앞 귤밭과 진돗개 보리와 잘 챙겨주던 주인 따님과 헤어지는 게 아쉬웠다. 다시 오겠다고 인사를 하니 다정하게 손을 흔들어 주며 또 한라봉을 주셔서 어제 준 것도 못 먹었다고 감사하다고 했다.
이 작은 마을도 며칠사이 정이 들어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지나왔다. 광령초등학교와 순댓국집, 아담한 집들. 하늘은 맑고 화창하다. 정감 어린 마을의 풍경도 맑고 예쁘다.
오늘은 올레 17코스를 걷는 날이다. 올레 17코스는 광령초 인근 호끌락북카페에서 출발해서 무수천 트멍길을 지나 외도와 내도 바당길을 거쳐 이호테우 해수욕장과 도두항을 지나 어영 소공원에서 중간 스탬프를 찍고 용두암과 관덕정을 지나 김만덕 기념관에서 마무리한다. 총길이 19.5킬로미터의 긴 길이다.
돌담과 집들이 있는 마을길을 걸었다. 제주는 지금(3월 24일) 청보리의 계절이다. 청보리 들판이 곳곳에 펼쳐져 있다. 초록의 청보리와 검은색 돌담이 어우러진 모습이 아름다웠다. 농사가 시작되는 계절이라 밭에 나와 있는 농부들도 보였다.
걷다 보니 무수천 길이 나왔다. '무수천'은 복잡한 인간사의 근심을 없애 준다는 개울이라고 한다. 한라산 장구목 서복계곡에서 시작된 물이 흘러서 외도동 앞바다까지 이어진다. 수량이 풍부해 제주의 중요한 물이기도 하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가물었는지 드문드문 물 웅덩이만 있고 건천처럼 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외도포구 가까이 갈수록 물의 양의 많아져서 커다란 물줄기를 이루고 있었다.
마을길이 끝나고 내도 포구가 나왔다. 바닷가에는 현무암과 더불어 제주도에서는 유일하게 자갈로 이루어진 내도 알작지가 있다. 자갈은 흐르는 물의 높은 유속 에너지로 만들어지는데 오래전 내도동 일대에 규모가 큰 하천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한다.
햇살이 뜨거워서 바닷가 정자에 올라가 쉬려는데 신발을 벗고 올라가라고 되어 있었다. 정자 마루가 집 마루처럼 반들반들했다. 신발을 벗고 올라가니 발은 시원하고 바닷바람도 선선하게 불어와 기분이 몹시 좋아졌다. 깨끗한 마루를 관리하기 위한 수고로운 손길에 감사함을 느꼈다.
걷다 보니 이호테우 해수욕장이 나왔다. 사람들이 해변가를 맨발로 걷고 있었다. 나도 얼른 신발을 벗어 들고 해변으로 들어갔다. 발에 닿는 모래의 감촉이 시원하면서 기분 좋았다. 밀려오고 밀려가는 제주의 맑은 바닷물이 발에 닿으니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해수욕장 끝까지 걸었다. 미역 같은 해초류와 잘게 쪼개진 현무암이 파도와 함께 밀려왔다 밀려갔다. 시원한 물속에 발을 넣고 멀리 남빛 바다의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떠나오길 잘했다.
개운해진 발 덕분에 다시 걸을 힘이 났다. 얼마쯤 가다 보니 언덕 위 바다를 바라보며 식사를 할 수 있는 깔끔한 음식점이 보였다. 점심을 먹으러 들어갔다. 입구를 못 찾아서 주방 쪽으로 들어가며 입구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주인장이 들어오는 곳이 입구라며 아무 데로나 들어오셔도 된다고 했다. 지금 입구 찾기에 성공하신 거라며 어서 오시라고 했다. 이 말이 좋았다. 환대받는 느낌이었다.
전복소라죽을 시켰다. 직접 담근 것 같은 밑반찬과 죽이 나왔다. 근데 죽이 너무 맛있었다. 깊은 정성이 느껴지며 신선한 바다의 맛이 느껴졌다. 양이 꽤 많았지만 그릇을 싹 비우고 계산하면서 죽이 너무 맛있다고 하자 주인장이 죽에 정성을 다하고 있다며 알아줘서 고맙다고 했다. 나는 오히려 맛있는 음식을 먹게 해 줘서 감사하다고 했다. 사람들의 입맛은 정성을 금세 알아차린다. 식당에는 손님이 계속 들어오고 나갔다.
도두동에 있는 '도두 추억애 거리'를 지나가는데 전통 놀이를 형상화한 조각과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이런 스타일이 대부분 좀 조악한데 이곳은 내공 있는 기획자가 있었는지 작품들이 좋았다. 특히, 벽화가 어린 날 향수를 진하게 자극했다. 별거는 없었다. 벽화에 사람 그림과 더불어 표현된 계절감이었다. 벚꽃이 흐드러진 가운데 전통놀이를 하는 아이들, 개나리가 만발한 날 병아리를 사는 아이들. 이 벽화를 보며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어린 날이 문득 가슴속으로 훅 들어왔다. 지나간 그날들이.
이번 코스에는 올라가는 길이 없어서 좋다고 생각하며 걷고 있는데 올레의 파란 화살표가 도두봉 정상을 가리키고 있었다. 계단을 오르는데 비행기 소리가 커다랗게 났다. 바로 앞이 제주공항이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비행기 소리로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도두봉 정상에 올라가 보고 올레길이 왜 그곳으로 났는지 이해했다. 그곳은 옛날에 봉화를 올리던 봉수대가 있던 장소이면서 제주공항의 모습과 활주로에서 비행기가 뜨고 내려오는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어영 소공원에서 중간 스탬프를 찍고 걸어가는데 바닷가에 관광객들이 많았다. 제주공항 근처라 도착한 첫날 혹은 출발하는 날 자투리 시간을 보내기 좋은 가까운 곳이라 그런 것 같다.
길은 길었다. 한참을 걸었는데도 아직 한 시간이 넘게 남아 있었다. 햇살이 등뒤를 달구고 기력도 떨어졌다. 카페에 들어가서 바다를 보며 시원한 에이드를 마시며 쉬었다. 비행기들이 쉼 없이 뜨고 내렸다. 아직 열흘 더 제주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감으로 밀려왔다. 삼십 분 정도 쉬고 나니 다시 걸을 힘이 생겼다.
관덕정을 지나 제주 원도심(탑동)에 들어와서 코스 종점인 김만덕 기념관을 향해 가는데 예약한 숙소가 보였다. 김만덕 기념관에 들어가 보고 싶었는데 월요일이라 휴관이었다. 숙소가 아라리오 뮤지엄 동문모텔 바로 옆이었다. 언젠가 아라리오 뮤지엄에서 감상했던 전시작품에 대한 강렬한 인상이 있어서 들어가려 했더니 월요일이라 이곳도 휴관이었다. 내일 갈 곳이 두 군데나 생겼다.
편의점에서 저녁과 아침에 먹을 걸 사가지고 숙소로 들어왔다. 이 숙소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극한의 미니멀리즘이라고 해야 하나. 들어오는 입구부터 범상치 않더니 숙소 문을 열고 들어서니 벽과 바닥이 모두 하얗고 원목침대와 하얀 이불, 작은 냉장고와 벽에 걸린 TV가 전부였다. 욕실도 마찬가지로 작은 사각형 세면대에 모든 것이 단순하고 깔끔했다. 하아... 뭐 하나 군더더기가 없다.
가장 좋은 것은 적당한 크기의 통창으로 언덕 위 마을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침대에 앉아 이 글을 쓰면서 통창으로 고갯길을 올라가는 사람들과 하나둘 불이 켜지는 집들을 볼 수가 있다. 답답할 것 같은 이 작은 방이 창문 하나로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
올레 17코스는 혼자 걷는 즐거움을 만끽한 길이었다. 긴 길이지만 다채로운 바닷길과 스쳐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어 혼자가 아닌 듯 혼자였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