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과 잡풀이 우거진 넓은 들판 뱅듸길
오늘은 올레 20코스를 혼자서 역방향으로 걸을 것이다. 숙소 바로 옆이 역방향 출발점이었다.
어제저녁 숙소에 들어오면서 편의점에 들러 아침에 먹을 것을 잔뜩 사가지고 들어왔다. 그런데 숙소가 조식을 제공하는 곳이었다.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근데 조식을 너무 늦게 줬다. 8시 50분이라니... 그래도 조식은 맛있었다. 우유와 이런저런 재료가 들어간 바삭한 토스트였다.
내가 6박 7일을 머물 숙소는 위치는 좋았지만 다른 건 생각보다 별로였다. 칭찬하는 후기가 많아 기대를 했는데 청결상태도 그다지 좋지 않았고 결정적인 것은 세탁을 할 수 없었다. 일주일을 머무는데 세탁이 안된다고 해서 황당했다. 대신 10분 정도 걸어가면 빨래방이 있다고 했다.
사용할 수 있는 냉장고도 없었다. 그래서 어제저녁 사가지고 온 음식을 창가에 놓았다가 걸으면서 점심으로 먹으려고 배낭에 넣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점은 카페를 같이 운영하는 곳이라 저녁 늦게까지 카페를 이용할 수 있었다. 그래서 노트북을 들고 나와 카페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30대 후반정도 된 숙소 주인장을 보면 어제 봉사자분이 말씀해 주신 '간세다리'가 생각났다. 간세다리는 제주어로 게으름뱅이인데 약간의 애정을 담아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카페도 숙소에도 손님도 없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넓은 숙소에는 나와 오늘 겨우 들어온 한 팀이 전부였다. 카페 바닥은 지저분하고 쓰레기통은 꽉 차있다. 카페 한구석에 앉아 계속 뭔가를 마시며 뭔가를 본다.
근데 이상한 건 그렇게 밉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음악을 틀어놓는데 이상하게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많았다. 나한테 맞춘 것 같지는 않은데 희한했다. 어제저녁에는 내가 노트북을 들고 카페로 나오고 조금 있다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가 나왔다. 지금 나오는 음악도 옛날 내가 좋아했던 드라마 '서울의 달' OST.
(이렇게 쓰고 있는데 간세다리 숙소 주인장이 지금 청소를 하고 쓰레기를 치우고 있다. 매우 열심히. 무슨 일이지...ㅎㅎ)
나는 숙소 주인장이 "바쁘게 앞만 보고 뛰지 말고, 간세다리처럼 천천히 놀멍 쉬멍 걸으라"라는 말을 실천하고 있는 지친 현대인처럼 보인다. 그냥 나 혼자 생각이다.
올레 20코스 역방향은 제주 해녀박물관에서 출발해서 세화해수욕장을 거쳐 뱅듸길을 지나 평대해수욕장과 좌가연대를 지나 행원포구 광해군 기착비에서 중간 스탬프를 찍고 월정리해수욕장과 김녕해수욕장을 지나 김녕 서포구에서 마무리하게 된다. 총길이 17.4킬로미터로 짧지 않은 길이다.
바닷가로 나와 걷기 시작하자 세화 해수욕장이 보였다. 기온은 높았는데 바람이 앞에서 불어와 추웠다. 다행인 것은 따가운 햇살이 뒤에서 비춘다는 것이다. 다 좋은 것도 다 나쁜 것도 없다. 걸어가면서 보니 세화민속오일시장이 있었다. 오늘이 26일이니 어제 장이 섰는데 몰랐다. 30일도 이곳에 있으니 장이 서면 가봐야겠다.
얼마 전 혼자 걸을 때 (사)제주올레에 연락해 놓으면 한 시간마다 전화를 해주어 안심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전화를 해두었다.
짧은 마을길을 지나 뱅듸길로 들어섰다. 뱅듸길은 주위에 밭도 있고 덤불숲도 있는 넓은 들판이다. 봄이 되어 정갈하게 갈아놓은 밭이 여기저기 보였다. 쪽파밭과 활짝 핀 유채꽃이 어우러져 있는 밭도 있었다. 이곳에서는 밭도 아름답다. 그냥 들판에 나무와 덤불이 우거진 긴 길도 있었는데 고즈넉하고 예뻤다. 아침 새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왔다. 나무가 터널을 이룬 짧은 길도 나왔다. 길이 너무 아름다웠다. 감탄을 하며 걷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가 무서워하지 않고 이런 외딴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올레길 걷는 내공이 조금씩 쌓이고 있다.
한 시간이 되자 제주올레에서 전화가 왔다. 자동응답이 아니라 사람이 직접 대화를 하는 것이었다. 전화를 못 받을까 봐 신경도 쓰이고 걷다 보니 외진 곳이 별로 없고 전처럼 무섭지도 않아 두 번째 전화에서는 이제 괜찮다고 전화 안 주셔도 된다고 했다.
이제는 어딜 가도 활짝 핀 유채꽃이 돌담과 파밭과 어우러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계절이 되었다. 환한 햇살아래 노오란 유채와 초록의 파 혹은 무 이파리가 검은 돌담과 어울려 있는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뱅듸길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는데 아끼면서 걷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좌가연대를 지나는데 유산관리부서 차가 세워져 있었다. 직원들 두 명이서 연대 주위에서 뭔가 일을 하고 있었다. 너무 집중해서 하고 있어서 인사도 못하고 그냥 지나왔다.
짧은 숲터널을 나와 걷는데 어느 순간 올레 깃발이 안보였다. 나는 올레길 안전수칙대로 깃발을 마지막으로 본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직선으로 가야 하는데 내가 옆으로 샜던 것이다. 다시 숲과 들판길을 걷는데 시인 박노해의 <걷는 독서>라는 시집에서 발췌한 글들이 군데군데 나무판으로 세워져 있었다. "쉼표가 없는 악보는 노래가 될 수 없다. 내 삶에 푸른 쉼표를"이라는 글은 지금의 나를 표현한 말 같았다.
광해군 기착지에서 중간 스탬프를 찍고 나니 점심 먹을 때가 되었다. 식당에 들어가서 따뜻한 밥을 먹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아침에 가지고 나온 것을 먹어야만 했다. 바닷가에 무심히 서있는 정자가 오늘따라 더 반가웠다. 신발을 벗고 올라가서 바람을 등지고 앉았다. 여전히 바람이 서늘하게 불고 있어서 조금 추웠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일단 요플레 두 개를 먹었다. 사과 한 개를 다 먹고 삶은 계란을 두 개 먹었더니 목이 메면서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어리버리한 나 자신이 너무 웃겼다.
바람을 맞으면서 우격다짐으로 가지고 나온 걸 다 먹었더니 따뜻한 커피가 먹고 싶어졌다. 카페에 들어갔더니 다행히 디카페인이 있어서 바다를 보면서 커피를 마셨다. 행복감이 밀려왔다.
바다색이 놀랍도록 아름다운 월정리해수욕장이 나왔다. 어느 카페를 보면서 몇 년 전 친한 사람들과 왔던 곳이라는 걸 알았다. 바람 부는 월정리 해안을 함께 걷고 오랫동안 쉬면서 바다를 보았던 기억이 났다. 지나간 것은 그립다.
종점을 5킬로미터 남기고 지루한 아스팔트 길이 계속되자 오랫동안 걷기도 했고 햇살도 뜨거워 지쳐갔다. 그러다 뱅듸길 같은 내수면길로 들어섰다. 들판에 세워져 있는 커다란 풍력 발전기와 날씬한 엄청나게 긴 탑 아래를 지났다. 현무암과 나무와 풀들이 잘 어우러진 길을 걷다 보니 걷는 즐거움이 다시 찾아왔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와 지친 몸과 마음을 토닥여줬다.
김녕 해안 주변에 점성이 낮은 용암으로 형성된 용암언덕인 넓은 바닷가 언덕길을 걸었다. 현무암 길이라 울퉁불퉁했지만 독특한 아름다움이 가득한 길이었다. 가끔씩 바람을 맞으며 언덕에 서 있었다. 영화의 주인공처럼.
하얀 모래언덕이 시작되었다. 바닷가에 이런 모래언덕이 길게 자리하고 있는 게 신기했다. 모래가 하얀 것은 조개껍데기가 부서지고 부서져서 모래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래언덕에는 여러 종류의 풀들도 자라고 있었다.
김녕해수욕장에 도착하자 완전히 지쳤다. 해수욕장 옆 야영장에는 텐트가 여러 개 보였다. 해수욕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철퍼덕 앉았다. 신발을 벗고 물속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발에 습기가 있으면 발목 보호대를 다시 하기가 너무 힘들어서 포기했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와서 나의 고단한 발을 식혀 주었다.
바다를 바라보는데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가며 끊임없이 철썩이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좋았다. 집으로 돌아가면 파도 소리가 오랫동안 귓가에 남아 있을 것 같다. 이 바다가 몹시 그리워질 것이다. 무심히 바라보는 하얀 모래와 쪽빛 바다, 검은 현무암이 조화로웠다. 바다가 쪽빛으로 보이는 것은 오랜 세월 동안 바다 밑에 살던 조개류, 산호, 성게 가시 등이 파도에 잘게 부서져 해안가로 밀려왔고 이 하얀 패사가 투명한 바닷물 아래 깔려 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우리 눈에는 환상적인 쪽빛으로 보이는 것이라고 한다.
올레길을 많이 걸어서 발이 닳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발가락이 욱신욱신했다. 오늘부터 그런 건 아니고 추자도 봉우리들을 걷고 난 다음부터 생긴 느낌이었다. 아프지는 않고 그저 욱신거리는 느낌만 있어 신기한 증상이다. 다시 걸어서 종점인 김녕 서포구에 도착해서 걷기를 마무리했다.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야 했다. 10분 후 도착하는 버스가 있었다. 어디서 힘이 났는지 날듯이(?) 뛰어서 정류장에 도착했다.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의 카페문을 보니 'CLOSED'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들어가 보니 간세다리 숙소 주인장이 빈백에서 곤하게 자고 있었다.
빨래를 해야 해서 가방에 잔뜩 넣어서 걸어서 10분 거리라는 빨래방으로 갔다. 10분 거리는 멀었다. 하지만 덕분에 동네 구경을 하게 되었다. '금정사'라는 절이 보였다. 며칠 전 엄마가 하신 말이 생각났다. 걷다가 절이 있으면 들어가서 염주하나 사 오라고. 제주도 좋은 공기 마신 염주니까 시간이 되면 사 오라고 하셨다. 빨래가 무거워서 못 들어가고 다음에 오리라 생각했다.
빨래방은 무인이 아니고 주인이 상주하며 도움을 주는 곳이었다. 빨래가 되는 동안 저녁 먹을 식당을 물어보니 근처 맛있는 제육볶음집을 소개해주었다. 세련된 인테리어에 1인석이 있는 식당이었다. 1인석에 앉아 창밖을 보며 식사를 하는데 자유롭다는 기분이 들었다. 낯선 곳에서 이렇게 혼자서 맛있게 저녁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도 자유로웠다. 옆자리에도 젊은 친구가 혼자서 밥을 먹고 있었다. 천천히 식사를 하고 빨래를 찾아 마을길을 걸어 숙소로 돌아왔다.
오늘 하루도 잘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