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강렬한 올레 21코스

땅 끝에 있는 오름, 지미오름

by 정안

올레 21코스를 역방향으로 걷는 날이다.


숙소에서 버스를 타고 가야 해서 평소보다 일찍 숙소를 나서야 했다. 먹을 게 있나 보니 사과 한 알밖에 없었다. 저녁에 사다 놨어야 했는데 아무 생각이 없었다. 사과만 먹고 버스를 타러 갔다. 버스가 올 때까지 시간이 몇 분 남아 있었다. 걷기 위해서는 아침을 챙겨 먹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바로 옆 편의점에서 크림빵 하나와 우유를 샀다. 버스가 예정시간보다 빨리 오는 경우도 있어 정류장에 서서 빵과 우유를 급하게 먹고 버스를 탔다.


종점인 종달바당에 함께 걷기(아카자봉) 참여자들이 모였다. 올레꾼들이 함께 걷고 헤어질 때 '길에서 다시 만나자'라고 인사를 하는 이유를 새삼 알게 되었다. 이날 참여자 중 네 명이 전에 함께 걸었던 사람이었다. 한 명은 네 번째 만남, 심지어 추자도 1박 2일도 같이 갔던 사람이었다. 또 다른 각각의 두 명은 며칠 전 비 오는 날 19코스를 함께 걸었고 한 명은 18코스를 동행했던 사진작가였다.


21코스 역방향은 종달바당에서 출발해서 종달항을 거쳐 지미봉 정상에 올랐다가 하도 해수욕장을 거쳐 성게 칼국수 맛집 석다원 맞은편에서 중간 스탬프를 찍고 별방진 길을 지나 제주해녀박물관에서 마무리한다. 총길이 11.3킬로미터의 짧은 길이다. 높고 가파른 지미봉만 올라갔다 내려오면 나머지는 대부분 평지길이다.


종달항을 지나 바로 지미봉이 나왔다. 지미봉은 제주 동쪽 끝에 있으며 '땅의 끝'이라는 의미를 가진 오름이다. 해발 165m로 아주 높지는 않지만 올라가는 길의 경사가 급했다.


올라갈 자신이 없는 사람들은 둘레길을 걸었다. 나는 힘들어도 올라가기로 결심했다. 조금 긴장한 마음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초반부터 계단의 경사가 급하고 가팔랐다. 얼마 올라가지도 않았는데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위를 올려다보니 급경사에 구불구불 끝도 없는 계단이 이어져 있다. 나의 거친 숨소리가 너무 커서 좀 창피했다. 모두들 힘들어하면서도 잘 올라갔다. 선두로 올라가다 힘들어서 쉬고 쉬고 했더니 거의 맨 뒤가 되었다. 올라가는 길은 300미터였다. 한참을 걸었는데 150미터... 나는 혼자 말했다. '150미터밖에 남지 않았네!'


중간에 사진작가가 사진을 찍어주느라 다 같이 쉬는 시간이 있는 게 고마웠다. 거동이 불편해 보이는 어르신이 내려오다 쉬느라 계단에 앉아 있었다. 나는 힘을 냈다. 며칠 전 지인이 계단을 올라갈 때나 내려올 때 일직선으로 걷지 말고 지그재그라 걸으라고 한 말이 생각나서 그렇게 했더니 도움이 되었다.


다행히 올라가는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30분 정도 올라가니 정상이 나왔다. 경사가 급해서 힘들었지만 길지 않아서 기뻤다. 정상에 올라가서 힘들게 올라온 이유를 알았다. 사방이 뻥 뚫리고 우도와 성산 일출봉이 바로 옆처럼 보였다. 종달리 마을의 모습과 바다도 한눈에 보였다. 누군가 날씨가 맑았다면 저 멀리 있는 섬도 보이고 마을의 모습도 훨씬 이뻤을 것이라고 했다.


올라가는 길만큼은 아니지만 내려오는 길도 경사가 급했다. 추자도 이후로 엄지발가락이 욱신거려 최대한 엄지발가락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애쓰며 내려왔다. 지그재그 걷기도 효과가 있었다. 지미봉을 올라갔다 내려오니 오늘 걷기를 다한 것 같았다.


지미봉을 내려와서 하도 해수욕장을 향해 가기 위해 커다란 돌다리를 건넜다. 그런데 한쪽은 바다이고 한쪽은 용목개와당이라는 저수지가 있었다. 용목개와당의 물과 바닷물이 다리 밑으로 오고 갔다. 용목개와당은 밀물 때는 바위 사이로 파도가 치는 역동적인 모습을 썰물 때는 드러난 바위 웅덩이에서 작은 바다 생물들을 관찰할 수 있다고 한다. 화산활동이 있었던 제주만의 아름다움이 있는 곳이었다.


바닷길을 걸어 중간 스탬프가 있는 석다원에 왔다. 그런데 스탬프 박스가 이제까지 본 것과 완전히 달랐다. 이 독특한 스탬프 박스는 강문석 작가가 제작한 작품이었다. 스탬프 박스가 도장을 찍는 보관함의 의미를 넘어 제주의 자연과 예술을 결합한 '아트간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탄생했다.


이 작품의 형상은 21코스가 지나는 하도리 인근 철새도래지의 상징인 '쇠가마우지'를 형상화하여 간세(제주올레의 상징인 조랑말)의 몸통 위에 앉힌 것이다. 재료는 동을 사용해서 제작했는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비바람에 노출되면서 동 특유의 청록색 녹이 슬게 되면서 주변 자연과 어우러지는 색의 변화를 의도한 것이다. 지금 설치된 것은 2023년에 새로 설치했다고 한다.


유채꽃과 수확하지 않은 무밭이 있는 농로를 걸어 별방진에 도착했다. 별방진은 조선 시대 제주 동북쪽의 방어를 위해 쌓은 성곽이다. 현재는 성벽 일부와 복원된 구역을 볼 수 있다. 성곽 위를 걸으며 하도리 앞바다와 마을 풍경을 감상하기 좋고 봄철에는 성 안쪽에 유채꽃이 만발하여 사진 명소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마을의 주요지점마다 현무암으로 각을 맞춰 쌓아 놓은 성벽은 하도리 마을 풍경을 색다르게 했다. 성벽 주위로 핀 노란 유채꽃과 어우러져 아름다웠다. 제주시는 지금 어딜 가든 유채꽃이 활짝 피어있다.


마을길과 농로를 걸어 해녀박물관에서 걷기를 마무리했다. 코스가 짧아 점심을 먹지 않고 걸어서 마무리한 후 늦은 점심을 먹었다. 회정식이었는데 세꼬시회가 푸짐하게 나와 회로 배를 채울 정도였다. 밑반찬도 맛있었다. 점심을 먹고 몇 명이서 분위기 좋은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셨다. 모든 계산은 각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헤어지면서 추자도에 함께 갔던 참여자가 나에게 브런치 글 잘 읽었다고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누구에게 말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았냐고 하자 뭔가를 찾다가 보았다고 했다. 아... 글을 쓰는 것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언제 어떤 인연으로 만날지 모른다 우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