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미오름과 알오름 그리고 아픔이 있는 곳 성산 터진목
올레 1코스를 혼자서 걷는 날이다.
바싹한 토스트가 맛있는 조식을 먹고 출발했다. 빨리 나가고 싶었지만 조식을 먹고 가려고 기다렸다. 혼자서 걷기 때문에 급할 것이 없었다. 201번 버스를 타고 시흥리에서 내렸다. 오늘 아침도 맑고 화창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자 시흥리에 대한 안내판이 보였다. '시흥리'는 '맨 처음 마을'이라는 의미이다. 제주에 부임한 목사가 제주를 둘러볼 때 시흥리에서 시작해서 종달리에서 순찰을 마쳤다고 한다. 제주의 마을 이름에 대해 알아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을 것 같다.
걷기 시작하는데 오른쪽으로 완만하면서 중간중간 깎여나간 돌의 모습이 독특한 오름이 보였다. 말미오름(두산봉)이었다. 말미오름은 말의 머리(또는 꼬리)를 닮았다고 하여 말미오름, 호랑이 머리 형상이라 하여 각호봉, 몸집이 큰 산이라는 뜻에서 두산봉(斗山峰)으로 불린다. 바닷속에서 먼저 분출된 큰 외륜산(말미오름) 안에, 나중에 육지에서 다시 분출된 알오름을 품고 있는 독특한 구조라고 한다.
아침인데도 햇살이 뜨거웠다. 가족인듯한 네 사람이 커다란 배낭을 메고 앞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밭담 안에 유채꽃이 오늘 가장 환하게 피어 있다. 제주시의 유채는 3월 말인 지금이 절정이다. 추위에 덜덜 떨면서 다녔던 3월 초가 지나고 조금씩 기온이 올라가서 이제는 한낮에는 덥다. 아직은 바닷바람, 산바람이 있어 더위가 잠깐 머물다 가지만 앞으로는 더워서 걷기 힘들 것 같다.
걸어가다 네 사람을 만났다. 엄마와 딸이 주고받는 말을 언뜻 들으니 중국어였다. "니하오"라고 인사를 했더니 딸이 가족들을 가리키며 "타이완"이라고 답했다. 중국인이라고 착각할까 봐 미리 말해주는 것 같았다. 1코스는 안내소가 말미오름(두산봉) 입구에 있었다. 안내소 봉사자분이 네 사람을 반기면서 나에게도 "타이완?"이라고 물었다. 난 웃으며 "코리안"이라고 답하며 지나왔다.
말미오름(두산봉)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혼자니까 자주 쉴 수 있어서 힘이 덜 들었다. 산책을 마치고 내려오는 사람이 간간이 있었다. 호젓하고 완만한 숲 속길은 아름다웠다. 올라가는 길이 일자로 쭉 뻗어있는 것이 아니고 지그재그 방식으로 계단과 맨흙이 교대로 이어져서 걷기 좋았다. 걷다가 스틱을 하나 꺼냈다. 초반에 체력을 좀 아끼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올라가다 말이나 소가 못 지나가게 설치한 문 앞에 서서 사진을 찍는 젊은 부부를 발견했다. 보니까 갈색말과 흰색말 두 마리가 인간은 신경도 안 쓴다는 자세로 유유히 풀을 뜯고 있었다. 바로 옆에 산불 감시초소가 있었다. 부부가 말이 무서워서 못 들어오는 줄 알고 내가 들어오는 시범을 보이고 들어오라고 했다. 어디에서 왔냐고 했더니 '네팔'이라고 했다. 네팔을 좋아한다고 하며 즐거운 여행되라고 하고 헤어졌다.
정상에 올라가니 성산포의 들판과 성산 일출봉, 우도가 한눈에 보였다. 사진을 찍고 내려오는데 산불감시원을 만났다. 내가 인사를 했더니 대뜸 "찾으셨어요?"하고 물었다. 나는 뭔지 모르지만 선문답 같아서 못 찾았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오름 아래 밭이 있는 곳을 가리키며 뭐가 보이냐고 했다. 나는 감탄했다. 밭담 안 노란 유채꽃이 신기하게도 한반도 지도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분은 감탄하는 나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내려오는 숲길은 완만하고 아름다웠다. 이제 올레꾼이 되어 가는지 혼자 걷는 숲길이 전혀 무섭지 않았다. 새잎을 내고 있는 크고 작은 나무와 시원한 그늘의 호젓한 길과 새들의 맑은 지저귐에 행복감이 밀려왔다. 그런데 이상하게 날파리들이 많아서 보니 말똥이 길 중간중간에 떨어져 있었다. 정상 근처에서 본 말도 그렇고 이곳에 말목장이 있는 모양이었다. 더 가다 보니 소나 말의 출입을 막기 위한 구조물이 또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구조물 색깔이 센스 있었다. 올레 깃발색과 같은 바다색과 귤색이었다.
말미오름 숲길에서 나오니 넓은 경사진 벌판이 펼쳐져 있었다. 사진을 찍으려고 섰는데 인기척이 들려 뒤돌아보니 젊은 남자가 숲에서 나오고 있었다. 내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자 그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같이 인사를 했다. 외국인 같았다. 그는 나를 앞서서 가버렸다.
올라가는 방향의 올레 표시에 '알오름'이라고 쓰여있었다. 알오름은 말미오름과 능선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었다. 알오름은 오름의 모양이 새알처럼 둥글고 매끈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큰 오름(말미오름)의 품 안에 있거나 바로 곁에 붙어 있는 작은 '새끼 오름'을 제주 방언으로 흔히 '알오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알오름 올라가는 길은 경사가 완만해서 나지막한 언덕을 산책하는 것 같았다.
알오름에서 내려와 농로를 걸었다. 밭일을 하러 나온 농부들을 드물게 볼 수 있었다. 들판에는 유채꽃을 비롯한 꽃들과 막 돋아나오는 연초록의 풀들로 생기가 넘쳤다. 숲을 벗어나 차가 다니는 도로로 나왔다. 걷다 보니 종달리 마을 표지석이 보였다.
종달리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종달초등학교는 규모가 있고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종달초등학교는 한때 전교생이 50명도 안 되어 폐교 위기를 걱정하던 곳이었지만, 제주형 자율학교(다혼디 배움 학교)로 지정되고 민주적 자치문화와 공동체 문화가 잘 형성되어 유학생 가족들이 선호하는 학교가 되었다고 한다. 종달리는 벽화와 집들이 잘 가꾸어진 마을이었다. 특히 마을 건물에 그려놓은 벽화가 상당히 수준있었다.
마을을 지나 바닷길이 시작되었다. 자전거를 탄 가족이나 연인들이 많이 지나갔다. 목화휴게소 옆에서 중간 스탬프를 찍고 다시 걸었다. 걷다 보니 점심 먹을 때가 되었다. '시흥 해녀의 집'이라는 식당이 보였다.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고 나갔다. 후기도 좋았다. 2층인 식당으로 올라가는데 입구에 개업을 축하한다는 화환이 늘어서 있었다. 다른 사람이 운영하던 식당을 그대로 인수한 첫날인 모양이었다.
주방에는 일을 도와주러 온 마을 사람들이 손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고 식당주인의 자녀들은 열심히 서빙을 하고 있었다. 식당 안은 개업을 축하해주러 온 마을 사람들이 많았다. 주인에게 봉투를 주며 축하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공동체가 살아있는 곳에서 볼 수 있는 흐뭇한 풍경이었다.
나는 이 집의 대표 메뉴인 조개죽을 시켰다. 그런데 개업날이라 보쌈고기 한 접시와 떡, 과일까지 주었다. 담백하고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나는 조개죽은 정말 맛있었다. 배가 고프기도 했고 맛도 있고 걸어야 해서 준 음식을 모두 먹었다. 반찬도 재료 본연의 맛이 살아있어 맛있었다. 개업일이라고 뭘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 카드수수료라도 아끼시라고 현금을 내고 나왔다. 그러면서 실소를 터트렸다. 맛있다는 후기를 올릴 결심을 했는데 영수증이 있어야 올라갔다. 이런이런...
걷다 보니 어제 우도올레에 갈 때 배를 탔던 성산항이 나왔다. 능선을 넘어 조금 걸어가니 넓고 평평한 언덕에 커다란 카페가 있었다. 넓은 마당에 바다를 보며 앉아 있을 수 있는 많은 빈백이 있었다. 언덕 위라 바다와 우도와 성산 일출봉이 앉아서 보였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커피도 마시고 싶고 빈백에 앉아 쉬고 싶기도 해서 카페로 들어갔다. 빈백에서 커피를 마시며 한 시간을 있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빈백에 누웠는데 너무 편했다. 하늘의 구름이 보이고 살살 불어오는 바람. 완전한 평화였다. 누워있다가 잠깐 잠도 들었다. 깨어나서 다시 커피를 마시고 누웠다. 성격상 걷다가 오래 쉬지 못하는 성격인데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한 시간을 빈백에 누워있다가 일어나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성산일출봉 주위는 유명 관광지답게 사람이 아주 많았다. 바닷가를 걷는데 카페마다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성산 터진목에 도착해서 성산읍 4.3 사건 희생자 유족회에서 세운 표지석을 읽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곳은 1948년 제주 4·3 사건 당시 성산읍을 비롯한 인근 구좌읍, 표선면, 정의면 일원의 양민들까지 끌려와 무참히 학살당한 곳이다. 당시 이곳에서 학살당한 성산읍 양민들만도 4백여 명이나 되며 특히 희생된 양민들 중에는 유족이 없어 이 모래알에 묻혀버리거나 바닷물에 떠밀려 가버린 시신도 허다하였다.
그처럼 뼈아픈 역사의 현장을 그간 아무런 표식도 없이 방치된 채 무수한 나그네들의 발길과 거친 파도에 유실됨은 물론 심지어 관계 당국의 무관심 속에 도로 확장이라는 미명 아래 역사의 현장 일부가 도로로 편입되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에 우리 유족들은 그 아픈 역사의 현장을 보존하고 보호하며 다시는 그런 비극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교육의 장이 되게 함은 물론 오가는 이들로 하여금 분향 묵념의 자리라도 마련하고자 건너편 서쪽 언덕에 건립한 추모비와 함께 여기 비극의 현장임을 알리는 조그만 표석을 마련한다."
2012년 11월 5일 성산읍 4·3 사건희생자 유족회 회원일동
'해원의 문'이라는 원형의 청동 구조물 안쪽에는 희생자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성이 같은 가족들이 많았다. 먹먹하고 아팠다.
"누가 알까
그때 총과 칼 그리고 죽창에
찔리고 찢기고 밟혀 죽임을 당한,
그걸 목격한 저 앞바다의 통곡을,
구천을 맴도는 한 맺힌 영혼의 절규를,
그 아픈 역사의 파편들을.
말없는 현장의 돌담 벽에
붉은 동백꽃잎으로나 새겨둘까
하얀 국화잎 한 잎 한 잎 떼어
해해 연연 조각난 세월로 붙여둘까."
2017년 4월에 제주 4·3 희생자 성산읍 유족회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을 가지고 살아오신 분들에게 어떤 위로를 드려야 할까. 잊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위로가 아닐까... 나는 이 아름다운 제주를 사랑하고 이곳에 새겨진 아픔도 기억하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아파할 것이다.
종점 스탬프를 찍고 201번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에 서 있는데 맞은편에 노오란 유채꽃이 너무 환하고 너무 화려하게 피어 있어서 더 슬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