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속에서 올레 2코스

쏟아지는 비와 기나긴 뱅듸길

by 정안

오늘은 올레 2코스를 혼자 걷는 날이다.

거기다 제주 올레 걷기 마지막 날이다. 오늘까지 걷고 내일은 4.3 평화기념관에 갔다가 28일간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제주를 떠난다.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일기예보는 하루 종일 비가 내린다고 했다. 우산과 우비를 챙겨 숙소를 나섰다. 버스를 타고 어제 1코스를 마무리했던 광치기 해변에서 내렸다. 노란 우비를 챙겨 입고 걷기 시작했다. 버스 정류장 앞 유채꽃밭은 화창했던 어제보다 흐리고 비 내리는 오늘 꽃들이 더 환했다. 오조리 내수면길을 걸어가는데 유채꽃을 보러 나오거나 산책하거나 운동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이슬비가 내리고 바람이 시원하게 불고 있어서 걷기 좋았다.


걷다 보니 식산봉(바우오름)이 나왔다. 오조리는 고려시대부터 왜구의 침입이 잦았다. 마을을 지키던 조방장이 군사가 많아 보이게 하려고 이 오름을 군량미가 산처럼 쌓인 듯이 꾸몄다. 이를 본 왜구들이 "병사가 얼마나 많기에 군량미가 산더미 같냐"며 겁을 먹고 물러갔다는 데서 '식산(食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오름 전체에 바위가 많아 제주어로 '바우오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비는 계속 내리고 지나가는 사람 중 식산봉에 올라가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같이 올라가려고 했는데 올라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안 올라가고 우회길을 걸었다. 멀지 않은 곳에 구름 안개에 덮인 성산 일출봉의 모습이 보였다. 사진을 찍었는데 흐린 날씨로 흑백사진처럼 나왔다. 그래서 더 신비의 섬처럼 보였다.


오조리 내수면은 쌍월이 아름답다고 한다. 성산 일출봉에서 보름달이 떠오르면 잔잔한 내수면에 달빛이 가득 비쳐서 또 하나의 월출장면을 볼 수 있는데 그 모습이 장관이라고 한다.


내수면길은 풍경이 매력적이었다. 호수 같으면서도 현무암과 중간중간 작은 섬처럼 나무들이 자라는 곳이 있었다. 데크길을 만들어놔서 걸으면서 풍경을 보기에도 좋았다. 오리들이 평화롭게 헤엄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오리 한 마리가 해초를 입에 물고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계속 지켜보았더니 가다 멈춰서 해초인지 해초 안에 있는 먹이인지를 열심히 먹더니 남은 해초를 버리고 헤엄쳐 갔다.


오조리 내수면(식산봉 인근 습지)은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곳으로 먹이가 풍부해 약 250여 종의 새들이 찾는 철새들의 낙원이다. 11월부터 이듬해 3월 사이에 철새들이 가장 많이 온다고 한다. 오늘은 오리들의 모습만 볼 수 있었다.


용천수 족지물을 지나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걷다가 공공건물이 있어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입구에 서있던 남자분이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 나는 통제하려는 줄 알고 긴장해서 화장실에 간다고 했다. 그분은 바로 옆 길가에 화장실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숲 아래 드문드문 진분홍의 복사꽃이 피어 있어 비 오는 중에도 마을이 환해 보였다. 길가의 벚꽃도 며칠후면 활짝 피어날 듯이 조금씩 피어나고 있었다. 유채꽃과 벚꽃이 어우러져 피면 아름다울 것이다. 설렘 가득한 꽃의 계절이 오고 있다. 벚꽃을 보고 제주를 떠나려고 했는데 가서 할 일이 있어서 아쉽지만 내일 가기로 했다.


올레 2코스 안내에서 오조리 마을에는 식당이 많지만 그 이후에는 밥 먹을 곳이 별로 없다고 나와 있었다. 이른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에 들어갔다. 깔끔한 돈카스, 카레집이었다. 식당 전주인과 새 주인이 인수인계를 하는지 음식 조리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는 소리가 들렸다. 카레 돈카스를 시켰다. 맛이 없지는 않았지만 고기가 조금만 더 부드럽고, 햇반 같은 밥이 더 따뜻하거나 직접 한 밥이었으면 맛있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내가 반찬을 가지고 자리로 오고 있는데 서빙하는 직원이 음식을 가져다 놓으며 아무도 없는 자리에 깊게 인사를 했다. 나는 바로 옆에 서 있었는데. 그 어설픔이 귀여웠다.


화장실에 가면서 뭔가를 물어보니 동시에 대답하느라 얼굴을 마주 본 전주인과 새 주인이 젊고, 놀랍도록 선한 얼굴이어서 기억에 남았다. 맛있게 잘 먹었다고 하며 나오면서 새로운 시작의 길에 선 젊은이의 식당이 잘되기를 바랐다.


오후부터 비가 많이 내린다고 해서 밥을 먹고 부지런히 마을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세찬 비가 쏟아졌다. 우비를 여미고 중간 스탬프가 있는 대수산봉 입구까지 왔다. 대수산봉(큰 물메)은 오름 정상의 분화구에서 옛날부터 물이 솟아나 못을 이루었다고 하여 '물메(물뫼)'라 불렀다. 동쪽에 있는 작은 물메(소수산봉)보다 커서 '대수산봉' 또는 '큰 물메'라고 부른다.


그다지 높아 보이지도 않고 예전에 한번 온 적도 있어서 올라가려고 대수산봉 입구로 한 발을 내디뎠는데 나무가 터널을 이룬 곳에서 첫 번째로 보인 것이 산소였다. 산소에서 놀던 어린 시절이 있어 산소를 엄청 무서워하지는 않는 편인데 세찬 비로 날씨도 컴컴해지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발길을 돌렸다. 비 오는 날 혼자 올라가는 것이 좀 무서웠다. 대신 둘레길을 걸었다.


비는 폭우 수준으로 세차게 쏟아졌다. 등산화 속으로 물이 들어오고 우비가 닿지 않는 바지 아래가 다 젖었다. 우산을 꺼내려는데 가방이 우비 안에 있어서 복잡했다. 비가 쏟아지는데 내가 우왕좌왕하고 있으니 지나가던 차들이 설듯이 천천히 지나갔다. 나는 도움을 원하지 않는다는 표시로 뒤돌아서서 우산을 꺼냈다. 그리고 느낌이 좀 이상해서 핸드폰으로 위치를 보니 탐나라가 아니라 완전히 딴 나라로 가고 있었다.


왔던 길을 돌아가서 대수산봉에 올라갔다가 내려올 위치쯤으로 가려고 노력했다. 간간이 핸드폰을 켜서 지도를 보면서 외딴 길을 걸었다. 한참을 걸어가자 반가운 올레길 표시가 나타났다. 잃어버린 어미를 만난 듯 기뻤다.


비는 세차게 계속 내리고 가도 가도 뱅듸길이 끝나지 않았다. 가다 보니 커피 박물관과 예전에 왔던 빛의 벙커 입구도 나왔다. 평지에 있는 하늘이 보이는 호젓한 숲, 사람 한 명 지나가지 않는 비 오는 날 뱅듸길은 길어도 너무 길었다. 뱅듸길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올레 2코스 뱅듸길은 최장 길이였다. 밭도 외딴 농가도 없이 오로지 숲길만이 계속되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숲길이 끝나고 차가 다니는 도로가 나오자 반가웠다.


혼인지에 도착했다. 비가 많이 쏟아져서 신발은 질척거리고 바지에서는 물이 떨어졌다. 한옥 처마밑 마루에 앉아 쏟아지는 비를 보며 쉬었다. 넓은 잔디마당에 전통의 곡선을 잘 살린 전통 음식관이 있고 그 옆 나무에서 벚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빗속을 벗어나니 풍경이 더 평화로워 보였다. 마루에 앉아 비 내리는 풍경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고 풍경만이 있었다.


혼인지를 떠나 종점인 온평 포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마을에서 한 젊은 할머니를 만났다. 어디 가냐고 물으시고는 혼자 다니지 말고 친구랑 같이 다니라고 했다. 나는 마음이 따뜻해져서 알겠다고 했다. 내가 어디 가시냐고 했더니 내일 하는 영등굿 준비를 위해 어촌계 사무실에 가신다고 했다. 할머니와 헤어져서 온평포구에 도착했다. 젊은 친구가 나처럼 우비를 입고 걸어오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동질감을 느끼며 밝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이렇게 비 쏟아지는 날 꿋꿋하게 걷는 자들의 동지애를 느꼈다.


온평포구에서 모바일 종점 스탬프를 찍는데 '완주를 축하합니다'라는 말이 안 나왔다. 중간 스탬프가 있는 대수산봉을 안 올라가서 올레 2코스는 미완으로 남았다.


이로서 나는 27개 코스 중 23개를 완주하고 1개는 미완으로 남고 3개 코스를 남겨 두었다. 제주에 있던 28일 중 도착한 날 하루, 지인이 놀러 와서 하루, 일주일살기 프로그램에서 치유의 숲 가느라고 하루,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하루를 못 걷고 24일을 걸었다. 걸었던 날이 행복했다. 잠들면서도 아침에 일어나서도 걸을 수 있어서 하루하루가 새로웠다. 걸으면서 살아있음을 느꼈고 나 자신을 만났다.


완주하기 위해 걸은 건 아니지만 걷지 못한 길이 있어 제주에 다시 올 이유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