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이 떨어지는 시간(10)

다시 배우는 사랑

by 제이엘

친정에 도착한 첫날,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를 봤다. 이상했다. 이런 엄마는 처음이었다. 막냇동생을 키울 때 많이 봤던 모습인데 뭔가 달랐다.


어릴 때 엄마는 우리를 돌보느라 일하느라 늘 바쁘고 정신없어했다. "빨리 먹어", "가만히 있어" 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런데 우리 아기를 바라보는 엄마의 얼굴에는 여유가 있었다. 마치 시간과 화해한 사람처럼. 아기 손가락을 하나하나 어루만지며 "이 작은 손가락들 좀 봐"라고 중얼거리는 모습은 정말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우리 강생아, 할머니 여기 있네."


엄마가 아기에게 건네는 목소리는 내 인생에서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막내한테도 이런 말투로 말했던가. 기억이 안 난다. 이렇게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었나? 30년 넘게 함께 살면서도 처음 듣는 음성이었다.


아빠의 모습은 더 놀라웠다. 평생 말이 없던 분이었다. 우리와 대화할 때도 "밥 먹자" 같은 딱 필요한 말만 하셨다. 그런 아빠가 아기 앞에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아기가 울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달려가고, 아기가 웃으면 따라 웃으며 "우리 돌콩이 웃네, 웃어."라고 말씀하셨다. 아기가 자면 옆에서 숨소리를 들으며 지키고 계셨다.


매일 아침저녁 내 침대 옆에 약을 놓아주시는 것도 놀랄만한 일이었다.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는 얘기를 병원에서 듣고 나서부터였다. 말씀은 하지 않으시고 그냥 놓아두셨다. 물컵과 함께. 정확히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 언제부터 시작하셨는지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가끔 내가 늦잠을 자면 문 앞에서 기다리시다가 내가 일어나면 들어와서 놓아주셨다. 한 번도 "약 먹어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지만 말이다.


부모는 자식에게 엄격하고 손자에게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어쩌면 자식을 키울 때는 미처 몰랐던 것들이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70년대, 80년대를 살아온 그들에게는 생존이 우선이었을 것이다. 먹고살기에 바빠서 사랑을 표현할 여유가 없었던 건 아닐까.


가다머라는 철학자는 "이해는 대화다"라고 말했다. 그동안 나는 부모님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을까.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던가. 나는 늘 일방적으로 판단하기 바빴다. 엄마는 차갑다고, 아빠는 무관심하다고. 엄마가 "공부해라" 할 때도, 아빠가 "일찍 들어와라" 할 때도 나는 그 말 뒤에 숨은 마음을 읽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냥 잔소리로만 들었다.


하지만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부모님을 보니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들이 우리를 키울 때와 지금 손자를 돌보는 때가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 그때는 부모 노릇을 처음 하는 초보였고, 지금은 인생의 깊이를 아는 경험자이다.


이제는 다르다.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아이가 얼마나 금세 커버리는지 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 영영 못 할 수도 있다는 걸 누구보다도 분명히 알고 있다. 자신들이 건강할 수 있는 시간이,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다. 그래서 지금은 아낌없이 표현한다.


엄마를 보면서 생각했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우는구나. 환갑이 넘어서도, 할머니가 되어서도 여전히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다. 나를 키울 때는 "엄마는 이래야 한다", "아이는 이렇게 키워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이 있었을 것이다. 실수하면 안 되고, 잘못 키우면 안 된다는 부담. 완벽한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 지금은 그 무게를 내려놨다. 그냥 할머니로서 순수하게 사랑하면 된다는 걸 안다.


엄마가 손자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엄마는 자신이 받았던 사랑과 지금 주고 있는 사랑 사이에서 뭔가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외할머니가 나에게 해주셨던 것, 엄마가 나에게 못 해줬던 것, 그런 것들을 다시 생각하면서 손자에게는 더 좋은 방식으로 사랑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강생아, 우리 강생아." 하며 부르는 그 애칭도 새로웠다. 나에게는 이런 애칭을 써본 적이 없었는데. 다정하게 어르는 그 손길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엄마도 나를 키울 때 이렇게 하고 싶었는데 못 했던 건 아닐까. 지금 손자에게 하는 모든 것이 그때 못 다한 사랑의 연장선인 것 같았다.


아빠의 침묵도 이제는 다르게 들렸다. 전에는 무관심인 줄 알았는데, 표현 방법이 다른 거였다. 매일 챙겨주는 약, 조용히 유지하는 집안 분위기, 아기가 울 때 누구보다 빨리 달려가는 발걸음. 내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아기를 전적으로 돌봐주는 것, 내가 낮잠을 자면 전화벨 소리도 작게 해놓으시는 것. 모두 아빠만의 언어였다. 아빠는 말 대신 행동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사람이었는데, 나는 말로만 사랑을 확인하려고 했다.


조부모의 사랑에는 뭔가 다른 게 섞여 있다. 자식에게 제대로 못 해줬다는 아쉬움, 그때 몰랐던 것들에 대한 후회, 더 부드럽게 대할 걸 하는 회한. 그래서 손자에게는 다르게 하고 싶어한다.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 사이의 대화 같은 거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걸 아는 사람들만의 절실함이 있다. 자식을 키울 때는 "앞으로 20년은 더 함께 살겠지" 생각했겠지만, 이제는 다르다. 10년 후, 20년 후가 확실하지 않다는 걸 안다. 그래서 더 간절하다.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사랑한다.


30년 넘게 함께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새로운 면을 발견한다. 이해는 끝나지 않는 과정이다. 우리는 평생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과정에서 사랑이 깊어진다.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그 마음 자체가 사랑이다.


엄마가 아기 목욕시키는 모습을 보며 놀랐다. 나를 목욕시킬 때는 "빨리 하자, 감기 걸려"라며 시간이 쫓기듯 씻기셨는데, 아기에게는 "물이 따뜻하지? 기분 좋지?" 하며 천천히 씻겨주셨다. 아기가 물장난을 해도 웃으며 지켜보셨다. 그 여유로운 모습이 신기했다.


우리는 모두 미완성인 채로 산다. 부모가 되어서도, 조부모가 되어서도 계속 배우고 자란다.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한다. 그 과정이 삶이다. 부모님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나 자신도 다시 발견하게 된다.


엄마가 아기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는 걸 들으며 울었다. "자장자장 우리 아가, 잘도 잔다..." 나에게도 저런 자장가를 불러주셨을까. 기억이 안 난다. 어쩌면 불러주셨는데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걸 수도 있다. 그때는 그 목소리가 사랑이라는 걸 몰랐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때는 정말 여유가 없어서 못 불러주셨을 수도 있다. 80년대에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기는 정말 바빴으니까.


중요한 건 지금이었다. 엄마는 내 아이에게 자장가를 불러주고 있었다. 그 목소리에는 모든 시간이 흘러들어가 있었다. 과거의 아쉬움도, 현재의 기쁨도, 미래에 대한 희망도. 그리고 무엇보다 이해하려는 마음이. 아기의 울음을 이해하려는 마음, 아기의 필요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그 자장가에 담겨 있었다.


아빠가 조용히 기저귀 갈아주시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내 때는 한 번도 하지 않으셨던 일이다. 그때는 "기저귀 가는 건 엄마가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남자가 그런 걸 하면 이상하게 보던 시대였으니까. 지금은 다르다. 망설임 없이 한다. 서툴지만 정성스럽게 한다. 시대가 바뀌고 생각이 바뀌면서 새로운 할아버지가 되신 거다.


아빠가 아기에게 말을 거는 모습도 새로웠다. "우리 강생아, 할아버지 보이지? 할아버지가 여기 있어." 나에게는 한 번도 이런 말투로 말씀하신 적이 없는데. 아기 앞에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신다. 목소리도 한 톤 높아지고, 표정도 부드러워진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부모님을 보며 깨달았다. 사랑은 이해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해는 때로는 말로, 때로는 침묵으로, 때로는 행동으로 나누는 끊임없는 대화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미완성이다. 부모도, 조부모도, 나도.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그 마음이 사랑이다. 서로 다르지만 함께 있는 것. 그것이 가족이고, 그것이 사랑이다.


친정에서 보낸 시간은 선물 같았다. 부모님의 새로운 얼굴을 보았고, 사랑의 다른 모습들을 발견했다. 무엇보다 이해라는 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알았다. 이해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주고받는 것이고,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이어지는 것이라는 걸 배웠다.


나도 언젠가 할머니가 될 것이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까. 내 아이가 어른이 되어 나를 보며 "엄마가 이런 면이 있었구나" 하고 새롭게 발견하게 될까. 그때까지 나는 얼마나 더 성장해 있을까.

우리는 사랑을 이어간다. 이해를 통해, 대화를 통해.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고, 오해하지만 다시 시도하며 그렇게 살아간다.

화, 목 연재
이전 10화꽃잎이 떨어지는 시간(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