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것은 멀리 있지 않다
수술 이후 엄마의 식사량은 현저하게 줄었다. 간호사의 말에 따르면 위는 9개월 된 유아의 기능 정도를 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했다. 식사량이 일정 양을 넘어서면 췌장암 수술 이후 발생할 수 있는 당뇨나 덤핑증후군은 차치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소화할 수 있는 양이 형편없이 줄었다. 그래서 한 끼 식사량이 평소 한 끼의 1/3이 넘지 않았고, 그런 이유로 세끼 식사 외에 두세 번의 간식이 필요했다. 몸을 회복하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한 번에 하실 수 있는 식사량 자체가 줄어 있으니 기본 식사량을 채우기 위해서도 간식은 필수였다.
엄마가 간식으로 즐기셨던 것은 단호박이었다. 수술 후 회복을 위해 다시 입원하셨던 병원에서 유방암으로 입원했던 같은 병실의 환우분이 나눠주셨던 단호박이 입에 맞으셨던 것이다. 퇴원 후에 단호박 한 상자가 택배로 도착했다. 대장암을 앓으셨던 외삼촌이 보내주신 것이다. 외삼촌도 종종 단호박을 간식으로 드셨는데 소화에 부담이 없고 든든하다고 하시며 평소 주문하시는 현지에 직접 택배 요청을 해서 보내주셨다. 크기는 작았지만 단단하고 모양이 예쁘고 색깔도 짙었다. 압력솥에 쪄 내니 밤처럼 포슬포슬하고 자연 단맛이 나서 맛도 좋았다. 그렇게 잡수시기 좋은 간식을 찾아낸 후부터 단호박은 한동안 엄마의 가장 좋은 간식이 되어 주었다. 단호박은 영양분에 비해 칼로리는 낮고 식이섬유가 풍부해서 소화가 잘 되는 재료라 일반인에게도 좋지만 환자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간식인 것 같다. 그 이후로 아침 식사 후 설거지를 하고 돌아서면 단호박을 씻어서 압력솥에 찌는 것이 기본 일과였다. 따뜻할 때 작은 단호박 반 개를 드시면 속도 든든하고 소화도 잘 되었다. 아버지도 잘 드셨다. 남은 단호박은 두유를 넣고 블라인더에 갈면 걸쭉하게 단호박라테를 만들었다. 단호박 라테는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가 산책 후에 드리면 또 잘 드셨다.
단호박을 즐겨 먹기 전에는 단호하게 거절하는 사람을 가리켜 단호박이라고 표현했던 적이 있다. 원래 의미인 달콤하다는 뜻과는 전혀 관계없이 직관적으로 단어만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지금은 다른 어떤 뜻보다 엄마에게나 나에게 ‘달콤한’ 호박이다.
삶은 달걀과 고구마도 훌륭한 간식이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먹는 삶은 달걀 하나의 가치를 신문 기사에서 읽은 적이 있다. 위에도 부담이 없어 소화도 잘 되고 영양소를 고루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고기나 생선처럼 별다른 조리를 하지 않아도 되니 간편함의 미덕까지 겸비했다. 어릴 때는 삶은 달걀보다 기름 두른 팬에 구운 달걀 프라이나 채소를 넣어 예쁘게 모양낸 오믈렛을 좋아했지만, 간식을 챙기면서 삶은 달걀의 진가를 다시 보게 되었다. 환자에게는 물론이고, 일반인에게도 더없이 좋은 간식거리라서 지금까지 냉장고에서 떨어지는 법이 없다.
고구마의 경우도 단호박과 비슷했다. 빛깔이 붉은 밤고구마나 노란빛을 띠는 호박 고구마, 재배 지역 이름이 붙은 고구마까지 종류가 많았다. 그중에서 엄마는 수분이 많은 것보다는 적은 고구마를 선호하셨다. 단호박 하나와 고구마를 아침 식후에 장만해서 압력솥에 쪄 놓으면 하루 간식거리로 먹기 좋았다. 가끔은 에어프라이어를 이용해 군고구마를 해 드려도 별미라며 잘 드셨다. 고구마도 단호박처럼 우유나 두유와 함께 갈아 드실 수 있어서 넉넉히 장만해도 부담이 없었다.
초반에 단호박이나 고구마를 찌고, 달걀을 삶을 때는 주로 가스레인지에 올려서 쓰는 압력솥을 이용했다. 잘 무르고 조리 시간이 단축되는 이점이 있지만, 불 사용에 신경을 써야 했다. 그러다가 바꾼 방법은 전기밥솥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전기 압력솥을 사용한 이후론 애물단지가 되어 쓰지 않고 퇴물이 되었던 일반 전기밥솥을 사용하기로 했다. 물을 바닥에 아주 조금만 넣고 달걀과 고구마를 넣고 취사 버튼을 눌러 두면 알아서 알맞게 익혀주니 가스레인지를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편리했다.
부족한 식사량을 채우기 위해 간식을 준비하면서 소화도 잘되고 몸에도 좋은 음식들을 알아가고 있다. 그렇게 시도한 음식들이래 봐야 대단히 특별하고 거창한 것이 아니다. 단호박, 달걀, 고구마 같은 흔하고 친숙한 것들이다. 구하기 쉽고 흔한 것들이지만, 평소에는 그다지 눈길과 손길을 주지 않았었다. 달걀이야 자주 먹던 급식에서도 여러 방식으로 자주 먹었지만, 단호박이나 고구마를 따로 챙겨 먹게 될 줄은 몰랐다.
문득 내가 챙겨야 할 것, 나에게 좋은 것들이 그런 흔하고 친숙한 것들은 아닌가 싶다. 평소에 나를 유혹하고 즐겁게 하는 것들은 귀하고 값비싸고 자극적이었던 것 같은데 정작 아픈 이를, 또 그를 돌보는 보호자를 위한 것들은 너무 가까이에 있었던 것은 아닐지...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 친숙함이 주는 다정함, 평범함이 주는 안정감이 나를 위로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