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은 먹었나? 요 앞에 잘하는 집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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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26일(목) 오후 8시 - 서울특별시 역삼동, 사옥
"먼저 들어가 볼게요 나무님"
"네 들어가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광해가 노트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현준과 지민도 30분 전, 먼저 퇴근을 했다.
발표까지 열흘이 남은 상황 - 월요일부터 매일 사무실에 남아 대본을 다듬고 있다.
".. 조사 결과, 명품관의 코너.. 여긴 와이래 어색하노"
근무 시간, 조원들에게 내색을 하지는 않지만 - 요 며칠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있다.
단, 절대 티를 낼 수는 없지. 잘해보겠다고 직접 못을 박아놓지 않았는가?
현준은 발표를 본인이 맡고 싶은 눈치인 것 같다.
쉬는 시간 화장실 거울 앞, 점심시간 산책 도중 - 나에게 틈틈이
'긴장 많이 되시죠?' 혹은 '부담되면 말씀해 주세요, 저도 있으니까'와 같이
위로가 섞인, 따뜻한 말을 해준다.
다만 - 조원들 앞에서 리허설을 하고 자료를 피드백할 땐
'저라면 이렇게 안 했을 텐데, 여긴 아쉽네요'와 같이
감정이 묻어나는 피드백을 주고는 한다.
이번 주엔 현준의 해맑은 미소와 웃는 눈을 본 적이 없다.
"어후.. 나머지는 내일 확인할란다"
기지개를 켜며 시계를 보니, 오후 9시를 가리키고 있다.
"가는 거예요?"
텅 빈 사무실 뒤편에서 누군가 말을 건다.
송 과장님이다.
"아, 네네 과장님. 계셨는지 몰랐네요"
"하하, 열심히네요. 아직 밥도 안 먹었죠?"
"네, 아직 안 먹었습니다"
"같이 밥 먹고 갈까요? 앞에 제육볶음 잘하는데"
"네, 좋습니다"
오래된 브리프 케이스에 바쁘게 서류를 담으며
송 과장님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오늘도 사발면에 김밥을 먹고 잘랬는데, 잘 된 참이다.
"인턴 힘들죠?"
사옥 문을 나서며 송 과장님이 말을 꺼낸다.
"힘.. 아뇨, 괜찮습니다"
"힘들 텐데~ 인턴은 힘든 게 맞죠, 아. 지금 너무 꼰대 같은가?"
"힘듭니다!"
"하하하하, 그쵸. 이제 2주 남았나요?"
"네, 영업일로.. 6 영업일 뒤에 발표입니다"
"6 영업일? 하하, 그냥 2주 뒤 월요일이라고 하면 돼요"
..
몇 마디 말을 주고받으며 7분 정도 걸으니,
골목에 간판이 하나 보인다
'아들부자 불백 (24시)'
"두 명 제육이요~"
송 과장님이 가게 문을 열며 말한다.
자리에 앉아 숟가락을 올려놓자마자 음식이 나온다.
빨간 고추기름과 적당히 볶아낸 고기 냄새가, 피곤한 정신을 확 깨운다.
"맛있게 먹어요, 여기. 진짜 맛집이야"
"넵, 잘 먹겠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과장님"
".. 난 맥주 하나 시킬 건데, 술 마시는가?"
"네네, 마십니다"
"그래요, 카스 시킵니다? 여기요~ 카스 한 병이요"
맥주를 받아 든 송 과장님은 숟가락으로 병뚜껑을 날리더니,
잔 두 개에 맥주를 가득 채우고는, 씨익 웃으며 하나를 들이민다.
유통 사업팀의 송기영 과장님,
오래된 가죽 가방을 들고, 매일 같은 색의 감색 정장을 입고서 출근한다.
수염이 빨리 자라는 건지, 점심시간에 마주칠 때마다 턱 밑이 새까맣게 물 들어있다.
사람 좋은 웃음소리를 내며, 허허실실 웃고 - 인사를 잘 받아주니
사무실의 인턴들에게는 천사라고 불린다.
다만. 가끔 등 뒤에서 들리는 업무 관련 얘기를 들어보면 - 정말 날카롭게 일하는 사람이다.
제육볶음을 두어 숟갈 먹고는, 송 과장님이 입을 연다.
".. 그, 말 편하게 해도 되려나?"
"네 그럼요 과장님, 편하게 해 주십시오"
"하하, 그래 나무 씨, 우리 팀에 젊은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 어색하네"
미소를 지으며 송 과장님이 말을 덧 붙인다.
".. 한 번 끝까지 잘해 봐, 난 나무 씨, 잘할 거 같아"
"네, 감사합니다. 잘해 볼게요"
송기영 과장이 웃으며 잔을 든다.
가볍게 잔을 치고는, 맥주 한 컵을 쭉 들이키며 말을 이어나간다.
"기죽지 마, 응?"
".. 네?"
"김나무 씨, 면접 때 진짜 잘했어. 멋있었어"
"면접.. 아!"
5명의 면접관이 있었다, 그중 한 분이 바로 송 과장님이었다.
말을 듣고 나니 면접관 분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다들 인턴, 공모전.. 이런 걸로 자기소개하는데 -
나무 씨는 경력 사항에 '족발집 알바' 한 줄이 끝이더라고?
궁금했지. 궁금해서 내가 물어봤잖아"
"아, 족발집 알바에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질문해 주셨습니다"
"음, 경쟁자들 이렇게 화려한데 당신을 뭘 가지고 있는가. 난 이력서에 쓰인 걸로 물어봤지"
".. 하하 제가 많이 부족하기는 합니다, 참"
"어려운 자리에서 뜬금없는 질문에, 침착하고 충실한 대답. 나름의 이유도 있고"
제육 한 숟갈을 뜨며 송과장님이 말을 덧붙인다.
"그런데, 요즘 나무 씨 부쩍 움츠러들었어, 본인이 생각해도 그렇지?"
".. 조금.. 네 하하, 죄송합니다"
".. 눈 돌려보면, 다들 학벌이니 자격이니.. 너무 높아 보이지?"
"..."
"그런데 말야. 일 할 만 하니 뽑았고. 다른 능력이 있으니 앉아있는 거야"
".. 감사합니다"
고개를 푹 숙인 나를 보며, 송 과장님이 말을 이어나갔다.
"자존감은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는 감정이고,
비교로 낮아지는 게 자존심이야.
자존심이 무너지면 자존감으로 버티는 거고. 그래서 자존감이 마음의 면역력이야.
이 회사에서 내가 면접 제일 잘 보고 들어왔다. 할 수 있는 사람이야 김나무 씨는.
알겠지? 내가 그거 보증하는 사람이야. 하하"
송 과장님은 택시비를 쥐어주고는, 회사로 돌아가셨다.
집까지 걸어서 두 시간. 그냥 걸어가야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몸은 피곤에 절어있지만, 정신이 이렇게 말짱한 적은 없었다.
"흡..."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오고, 설움이 북받친다.
강남 한 복판에 멈춰 서서, 추하게 눈물이 줄줄 흐른다.
서글프다. 그런데, 슬프지 않다.
소매로 눈가를 슥슥 닦으며, 네이버 지도를 열어 걸어가는 길을 검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