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나 한 대 필까요?
이전 회차: ["객기"] - https://brunch.co.kr/@treekim/24
2021년 8월 18일 (수) - 서울특별시 강남구
인턴 7주 차, 프로젝트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고
다음 주면 각 조는 최종 발표를 하게 된다.
사무실의 공기는 무거워졌다. 각자 자리에서 키보드 소리만 요란했고
초반부터 삐걱대던 몇몇 인턴은, 자리에서 이력서를 쓰고 있다.
광해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말한다.
"그거 준비 됐나요? 오늘까지 제출해야 하잖아요."
지민이 눈길도 주지 않고 대답한다.
"준비 다 됐어요, 나무님한테 자료 받으면 완성될 거예요"
현준과 광해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나는 들고 있던 커피잔을 테이블에 놓으며 대답했다.
"아, 거의 마무리 됐어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현준이 웃음을 지어 보이며 덧붙인다.
"나무님 자료 붙이고, 그걸로 오늘 마무리하죠!"
눈이 퀭하고, 볼은 쏙 들어간 현준이 입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지민은 말없이 화면을 바라본 채,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린다.
그 리듬이 점점 빨라지는 듯했다.
테이블을 두드리는 저 소리가 꽤 마음을 좀먹는다.
지난 회식 이후, 광해는 업무 분장을 다시 해 보자고 제안했고 -
나는 고객 조사에서 - 데이터 분석과 정리로 롤이 변경됐다.
그 덕에 매일 밤, 모텔 화장대에 앉아 엑셀 함수 강의를 듣고 있다.
서둘러 엑셀 파일을 정리하며 불안함을 억누른다.
회식 이후, 책상에 앉아있으면 마음 한 편이 쿡쿡 쑤시곤 한다.
'너 할 줄 아는 게 뭐냐고'
그 소리는 아침, 저녁으로 내 귀에 공허하게 울려댔다.
"보냈어요 지민 님"
"네"
지민은 화면을 보며 대답을 했다.
아니, 정확히는 말을 흘렸다.
"다들 수고하셨어요! 저희 잠깐 쉴까요?"
광해가 노트북을 덮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오후 7시가 막 지난 참이다.
현준과 지민도 노트북을 덮고, 자리에 엎드린다.
"나무님, 옥상 진짜 좋은데. 가 보셨어요?"
광해가 다가와 내 어깨를 두드린다.
"아뇨, 옥상은 안 가봤어요"
"옥상에서 커피 한 잔 할까요? 담배도 태우시죠?"
"아 네네, 가시죠"
광해는 매일 자리에 앉아 자료를 정리한다.
다 같이 커피를 사러 갈 때 말고는, 누구에게 같이
일어나자고 하는 법이 없는 사람인데 - 담배를 태우는 것도
방금 알게 된 사실이다.
14층, 옥상에 올라서자
늦은 여름 - 밤바람이 살며시 얼굴을 스친다.
차의 경적 소리와 버스 소리가, 아래에 깔리듯 멀리서 들려온다.
빌딩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탁하지만,
누군가 내 어깨를 쓸어주는 느낌이 든다.
광해는 가볍게 담배에 불을 붙이며 한 모금 깊게 들이마신다.
그리고는 천천히 연기를 내뱉으며 말했다.
"벌써 7주 차네요, 이제 인턴도 일주일 남았네요"
"그러게요, 시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가는 거 같습니다"
".. 여기"
광해가 주머니에서 캔커피를 하나 꺼내준다.
"아, 잘 마실게요 감사합니다."
".. 여기 가끔 올라와요, 혼자서. 생각 정리도 잘 되고요"
"사실 조장님 담배 태우시는 거 오늘 알았어요"
"가끔 혼자 있을 때 올라와요. 눈치도 보이고.."
광해가 피식 웃으며 연기를 아래로 내뿜으며 덧붙인다.
"저는 이제 서른이에요,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들어왔거든요"
"..."
"그래서 열심히 하고 있어요, 운 좋게 좋은 팀도 만났고"
좋은 말이다. 그리고 따뜻한 말이다.
다만 말문이 턱 - 하고 막히며, 다시 무엇인가 속을 누르는 느낌이 든다.
"저는.. "
광해가 말을 끊으며 나를 돌아본다.
"나무님, 나무님이 최종 발표 하시죠"
"네?"
"최종 발표요, 저희 발표할 사람 안 정했잖아요"
"아우 제가요? 발표는 조장님이나 다른.."
"조장이 정하는 거예요, 발표는 나무님이 제일 잘 할거 같아요"
당황스러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수군대는 말을 들어보면, 보통 발표는 팀의 에이스가 한다.
내심 부담이 되면서도, 놓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
"나무님, 고객 인터뷰 때 보면 - 정말 잘하시더라고요"
광해가 나를 돌아보며 덧붙인다.
"우리 중에 아무도 나무님처럼 못해요, 현장이랑 고객이 제일 중요한데,
나무님이 제일 잘 알고, 제일 잘 전달할 거예요"
"제가.."
"해줄 거죠?"
단순한 격려의 말일 수 없는 무거운 말.
서른 살 인턴 조장에게 커다란 부담이었을 거다.
"네, 할게요"
광해는 미소 지으며 담배를 털었다.
"제일 잘하실 거예요"
"팀원들이랑 얘기해야 하지 않나요?"
"그럼요, 내려가서 얘기해 봐요, 저는 나무님한테 표 던집니다"
광해는 웃으면서 옥상 입구로 걸어간다.
"먼저 내려가세요, 저 좀 쉬다 갈게요"
"그래요, 여덟 시 반에 모여요"
광해는 어른인 걸까.
아니면 순간의 치기인 걸까.
내려가서 발표자를 정하는 얘기를 하게 될 텐데,
팀원들의 반응은 어떨까.
그래도 꽤나 열심히 하고 있는데,
다만 발표자를 맡아도 될 만큼 도움이 된 사람인 걸까.
..
고개를 툭 하고 떨구어 빌딩 아래를 내려다본다.
작은 점들이 열심히 도보 위를 돌아다닌다.
꽤나 늦은 시간인데, 다들 열심히 살아가는구나. 싶다.
담배를 비벼 끄고는, 시멘트 통 안에 던진다.
"일단 내려가자"
"저희 이제 발표자 정할까요?"
사무실 자리에 앉은 광해가 입을 연다.
"네, 빨리 정해야겠네요"
지민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한다. 왜 이제 말을 꺼내냐는 듯한 반응이다.
광해가 지민의 얼굴을 잠시 확인하고는, 입을 연다.
"제 생각에, 발표..."
"발표 제가 해도 될까요?"
지금 내 표정은 비장하다.
아니, 그렇게 보였으면 좋겠다.
광해의 입가엔 미소가 띄었고, 팀원들이 나를 바라본다